「선명한 유령」/ 조영석/ ≪문학동네≫2004년 가을호, 신인상 수상작 中
선명한 유령
그는 일종의 유령이므로 어디든 막힘없이 떠돌아다닌다.
그의 모습은 선명하지만 누구의 눈길도 받지 않는다.
다만, 개들이 알아채고 짖을 뿐이며 비둘기들이 모여들 뿐이다.
그에게는 땅이 없지만 발을 딛는 곳이 모두 그의 땅이다.
그는 사람의 집이 아닌 모든 집에 세 들어 살 수 있다.
쥐와 함께 자기도 하며, 옷 속을 바퀴벌레에게 세 주기도 한다.
그의 땅은 기후가 사납다. 폭우가 내리기도 하고
폭설이 내리는가 하면 모래바람이 불기도 한다.
그래도 그는 걱정이 없다. 그가 지나가면 그의 땅은 사라지므로.
오히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물과 먼지를 빨아들여 갑옷처럼 단단해진다.
그의 옷은 그의 살갗이다.
그의 몸은 카드와 화투 마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그것들을 먹었는지 그것들이 그를 먹었는지 알 길은 없다.
분명한 것은 그것들이 발효된다는 사실이다.
그에게서는 썩어가는 생선대가리 냄새가 난다.
사람들, 저마다 작은 집과 작은 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몸만큼의 권리를 지닌 채 실려가는 지하철에서 나는
그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칠 인용 의자에 누워 있었다.
그가 누우면 의자는 침대가 되었다.
그가 움직이면 그 칸은 그의 전용객차가 되었다.
그의 냄새 앞에서 사람들은 권리를 주장하지 못했다.
그는 냄새의 포자를 뿌리며 번식한다.
포자를 덮어쓴 사람들은 잠재적 유령이 된다.
그가 걷는 길이 곧 그의 길이며, 그가 먹는 것은 모두 음식이다.
일단 그가 되고 나면, 그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냄새로만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그는 일종의 유령이다.
[감상]
죽은 사람의 혼령을 유령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유령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랑자입니다. 묘하게도 유령에 대한 두려움이라든가 혹은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전조까지 이 시는 ‘그’와 ‘유령’을 동일한 것으로 묘사해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제 유령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명한’ 실존의 것입니다. 이 접점에서 시적인 직관이 작용된 것이겠지요. 지하철을 떠도는 그는 '무관심' 때문에 도통 보이지 않았던 유령인 셈입니다. 그가 곁에 왔을 때 그의 실존에 두려움을 느끼며 코를 틀어막는 사람들에게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