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中 / 안도현/ 현대문학
늙은 정미소 앞을 지나며
왼쪽 어깨가 늙은 빨치산처럼 내려앉았다
마을에서 지붕은 제일 크지만 가재도구는 제일 적다
큰 덩치 때문에 해 지는 반대쪽 그늘이 덩치만큼 넓다
살갗이 군데군데 뜯어진 덕분에 숨쉬기는 썩 괜찮다
저녁에는 나뒹구는 새마을 모자를 주워 쓰고
밥 냄새 나는 동네나 한 바퀴 휙 둘러볼까 싶은데
쥐가 뜯어먹어 구멍난 모자 속으로 별들이 쏟아질까 겁난다
어두워지면서 못 보던 쥐들이 찾아와서 쌀통이 비었네,
에구, 굶어죽게 생겼네, 투덜대며 뛰어다니는 통에 화가 좀 났다
그럼 바닥에 수북한 까맣게 탄 쌀알 같은 쥐똥은 뭐란 말인가
밤이 되니 바람이 귓밥을 파주겠다며 달그락거린다
그렇다고 눈물 질금거리는 전등 따위 내걸지 않는다
혹자는 이미 죽어 숨이 넘어간 목숨이라는데
아직은 양철 무덤을 삐딱하게 뒤집어쓰고 버틸 만하다
[감상]
요즘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이 들뢰즈의 '생성 혹은 되기'입니다. 이 시를 그의 이론에 비춰본다면 '늙은 정미소 되기'겠지요. 이 시는 늙은 정미소가 바라보는 일상의 풍경을 애잔하게 보여줍니다. 화자인 늙은 정미소는 겁이 났다가 화를 냈다가 혹은 스스로 안위합니다. 이렇게 가장 인간적인 면을 정미소의 성격으로 부여하는 시인의 솜씨는 정말 다시 봐도 새롭습니다. 특히 '그럼 바닥에 수북한 까맣게 탄 쌀알 같은 쥐똥은 뭐란 말인가'의 논리가 인상적입니다. 그동안 나는 보여주고 스케치하는 데에만 치중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깨달음을 갖게 하는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