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왕십리 - 권혁웅

2001.04.10 14:08

윤성택 조회 수:1841 추천:292

* 현대시 동인상 수상작/ 권혁웅

왕십리



새로 두 시에 산등성이를 건너온 비는
내 방 창을 두드린다 창문에
조팝나무 잎이 우표처럼 붙어 있었다
먼 데 있는 것들이 문득 소식을 전하는 때가 있다
지나쳐온 것들이 중국집 스티커나 세금 고지서처럼
문 앞에 부려져 있을 때
그걸 묵은 신문지와 함께 버릴 수 있나?
웃기고 있네. 나는 科金別納처럼 살았어
내 자리 어디선가 조금씩 내가 빠져나간 거지
세 시가 되니 비는 더 심해져서
파도치는 소리를 낸다 창문을 여니
먼 데 불빛이 어렵게 깜박인다
누군가 구조신호를 보내는 게지
구름 뒤에 둥글게 빛나는 달이 있듯이
저곳 어디에 왕십리가 있을 것이다
나는 外道가 지나쳤다,라고 木月은 말했지만
아니다, 나는 처음부터 저 길 너머에 있었다
새로 세시에서 네 시로 지나가는 저 비처럼
나는 세상을 건너갈 수 없었다
왕십리, 십리가 멀다 하고 찾아갔던 곳
하지만 늘 십리는 더 가야 하던 곳
내게도 밤을 디디고 가야 할 곳이 있다
몰론 왕십리에 가기 전에, 왕십리도 못 가서
나는 發病이 날지도 모르지만


[감상]
현실에서 이상으로 나아가는 흐름이 참 잘 다듬어진 시입니다. 처음 목격된 것에서부터, 자신의 의식으로 점진적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묘한 흡입이라고 봅니다. '창문에/ 조팝나무 잎이 우표처럼 붙어 있'다든지, '먼 데 불빛이 어렵게 깜박인다/ 누군가 구조신호를 보내는 게지'처럼 낯설지만 신선한 표현력도 눈여겨볼만 합니다. 왕십리, 그 십리가 내 생의 전부였다니.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91 꽃피는 아버지 - 박종명 [4] 2001.04.03 3083 281
1190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 박라연 [1] 2001.04.03 2094 300
1189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 [2] 2001.04.03 3110 294
1188 봄의 퍼즐 - 한혜영 [2] 2001.04.03 2353 313
1187 나무의 내력(來歷) - 박남희 [2] 2001.04.04 2040 291
1186 낙타 - 김충규 [1] 2001.04.04 1996 288
1185 구부러진 길 저쪽 - 배용제 [1] 2001.04.06 1937 296
1184 오존 주의보 2 - 문정영 [1] 2001.04.07 1846 299
1183 넝쿨장미 - 신수현 [1] 2001.04.07 2043 332
1182 그물을 깁는 노인 - 김혜경 [1] 2001.04.09 2629 306
1181 세월의 변명 - 조숙향 [1] 2001.04.09 2476 273
1180 정기구독 목록 - 최갑수 [1] 2001.04.10 1879 280
1179 제기동 블루스·1 - 강연호 [2] 2001.04.10 1800 283
» 왕십리 - 권혁웅 [1] 2001.04.10 1841 292
1177 트렁크 - 김언희 2001.04.11 1757 332
1176 우체통 - 이진명 2001.04.11 2537 334
1175 날아가세요 - 허연 2001.04.12 2171 327
1174 우울한 샹송 - 이수익 2001.04.13 1876 324
1173 찬비 내리고 - 나희덕 2001.04.14 2112 302
1172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 허수경 2001.04.16 2124 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