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육교 - 최을원

2004.02.28 14:26

윤성택 조회 수:1756 추천:193

육교/ 최을원/ 《시인정신》 2004년 봄호


        육교


        자정의 눈 내리는 육교 위,
        그녀는, 地上의 가장 먼 마을에서 달려온 따뜻한 불빛들이
        자신의 다리 밑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흘러가는 것들

        캐롤도 흘러가고, 온 몸에 추억처럼 알전구 감은 가로수들도
        흘러가고, 술 취한 빌딩들도 흘러가고

        ...쪽방, 화장대, 한강 유람선, 월미도, 만화가게, 공중목욕탕...
        달력의 붉은 동그라미 속에 웅크린 태아처럼 갇혀 있던 사흘간의 시간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내렸다

        좁고 가파른 계단은 무너지고 무너졌다
        수술대가 뗏목처럼 어둠 속에 너울너울 떠가자
        의식 속에서 둥근 형광등이 한꺼번에 팍, 터졌다
        핑-, 현기증이 난간을 움켜잡았다

        도시 전체가 어디론가 바삐 가고 있었다
        눈발이 그들의 발자국들을 빠르게 지워 갔다

        가야하는데
        가야하는데

        기억을 빼곡히 채워 가는 눈발 속,
        육교 하나만 갈 곳 모른 채
        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는 것이었다


[감상]
육교를 그냥 육교로 보지 않고 사창가 여인으로 옮겨낸 시입니다. 육교에서 현기증을 일으키는 풍경이 선하고, 육교 아래 수없이 지나치는 차들의 행렬이 쓸쓸한 정경으로 남습니다. 시에 있어 이처럼 포착이란 다름 아닌 새로운 발견입니다. 움직일 수 없는 육교에게 생명과 의미를 심어 주는 이 시의 미덕은 여인이 살아온 내력 너머 희망과도 같은 것일까요.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시인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31 바람막이 - 신정민 [2] 2007.06.13 1303 141
1030 검은 젖 - 이영광 2008.02.12 1221 141
1029 무의지의 수련, 부풀었다 - 김이듬 2007.01.19 1146 143
1028 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 - 고영민 [2] 2008.06.17 1897 143
1027 검은 편지지 - 김경인 2007.07.24 1159 144
1026 녹색에 대한 집착 - 정겸 2007.06.08 1355 145
1025 공중의 시간 - 유희경 2008.12.16 1526 145
1024 얼굴 없는 기억 - 김일영 2003.04.10 1095 146
1023 물의 베개 - 박성우 [1] 2007.04.25 1307 146
1022 밤의 능선은 리드미컬하다 - 문세정 2008.01.29 1328 146
1021 합체 - 안현미 2010.01.06 1029 146
1020 오래전에 잊은 이의 눈썹 - 허수경 [2] 2011.03.15 1813 146
1019 그 집 - 김우섭 2007.06.26 1504 147
1018 타전 - 정영선 2007.07.02 1237 147
1017 혀 - 장옥관 2010.02.12 1757 147
1016 두 번 쓸쓸한 전화 - 한명희 [1] 2003.08.18 1229 148
1015 허공의 안쪽 - 정철훈 [2] 2007.05.30 1508 148
1014 저녁 빛에 마음 베인다 - 이기철 [1] 2007.07.06 1545 148
1013 목단꽃 이불 - 손순미 2003.04.15 1004 149
1012 꿈속에서 아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 - 이진명 2003.05.27 1018 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