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교/ 최을원/ 《시인정신》 2004년 봄호
육교
자정의 눈 내리는 육교 위,
그녀는, 地上의 가장 먼 마을에서 달려온 따뜻한 불빛들이
자신의 다리 밑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흘러가는 것들
캐롤도 흘러가고, 온 몸에 추억처럼 알전구 감은 가로수들도
흘러가고, 술 취한 빌딩들도 흘러가고
...쪽방, 화장대, 한강 유람선, 월미도, 만화가게, 공중목욕탕...
달력의 붉은 동그라미 속에 웅크린 태아처럼 갇혀 있던 사흘간의 시간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내렸다
좁고 가파른 계단은 무너지고 무너졌다
수술대가 뗏목처럼 어둠 속에 너울너울 떠가자
의식 속에서 둥근 형광등이 한꺼번에 팍, 터졌다
핑-, 현기증이 난간을 움켜잡았다
도시 전체가 어디론가 바삐 가고 있었다
눈발이 그들의 발자국들을 빠르게 지워 갔다
가야하는데
가야하는데
기억을 빼곡히 채워 가는 눈발 속,
육교 하나만 갈 곳 모른 채
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는 것이었다
[감상]
육교를 그냥 육교로 보지 않고 사창가 여인으로 옮겨낸 시입니다. 육교에서 현기증을 일으키는 풍경이 선하고, 육교 아래 수없이 지나치는 차들의 행렬이 쓸쓸한 정경으로 남습니다. 시에 있어 이처럼 포착이란 다름 아닌 새로운 발견입니다. 움직일 수 없는 육교에게 생명과 의미를 심어 주는 이 시의 미덕은 여인이 살아온 내력 너머 희망과도 같은 것일까요.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시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