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갇히다」/ 김영섭/ 《리토피아》 2004년 봄호
비에 갇히다
내리꽂히는 미싱바늘이다
비가 내 발등 위를 드륵드륵 누비고 있다
발가락 하나 꼼지락 못하고 자판기처럼 서있다
누가 동전을 투입한다면,
큰일이다 '고장'쪽지를 붙이지 못 했다
벽처럼 비껴 숨죽이는 일도. 아이템이었다. 아랫입술에서 윗입술까
지. 그 높이가 느껴질 때. 오후 3시 늦은 자장면 배달 같은. 부피를 가
진다. 하지만 그 다면체를. 개봉하지 못한다. 폐업한 명함 같은 것이
어서. 한때 잡히는 대로 죽어라 끌어당긴 사내. 그 팽팽한 시간대에는.
비가 내리는 법이 없었고. 살 냄새가 진동하는. 낮거리가 잦았다. 반
환점 깃대를 돌아 나온 지 오래다. 지금 또 깃대를 만난다. 장마전선
에서 맴도는. 애초에 없었던 코스를. 생면부지 어떤 놈에게 내놓으라
고. 흉기를 뽑아든다. 이 위험한 설정 속으로. 돌멩이처럼 굴러 들어
오는 사람들. 손아귀가 헐렁해진다.
빗줄기가 기어오른다
예비군훈련 갔다 잘라버린 정관을, 그 끝과 끝을 드르륵 이어 놓는다
동전이 툭-
한편에 고여있던 내가 주르르 흘러내린다
[감상]
2연을 유심히 보게 되는데, 파편화된 의식의 흐름을 짧은 문장으로 잇대 놓은 것이 독특합니다. 독자가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을 소통의 구조로 만들어냈다는 점도 신선하고, 자판기와 비에 대한 끊임없는 상상력도 공감이 갑니다. 결국 비로 인한 자의식은 정관을 통해 배설되는가 봅니다. 우리는 기계화된 일상에서 '관계'라는 백동전을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인과는 투입구와 배출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