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나무에 묻다」/ 박진성/ 《창작과비평》 2004년 봄호
밤나무에 묻다
절름발이 명수 아버지는 간암 선고 받고 목 매달았다 신촌리 윗말 밤나무에
매달려 밤이 되었다 어린 내 볼에 그가 얼굴 부비면 밤송이처럼 환하게 열리
던 공포, 한쪽 다리에 월남 원시림 품고 그이는 금강으로 갔다
가난은 울음이 아니다, 江心으로 나아가는 배는 침묵을 싣고 무거워진다 다
리뼈 하나 만큼 안개 절뚝이며 살갗에 닿는다 나는 흐린 시야에 기대어 뻣뻣
한 다리를 만지작거린다 윗말 명수네 우물 속 밤송이 몇 개 제 힘으로 열리고
있으리라
가난한 밤나무가 금강 물줄기를 끌어올리는가
배가 먼 산에 매달리고 있었다
[감상]
월남 상이용사라고 하지요. 고엽제 등 전쟁의 상흔이 아직도 남아 있는 분이 많습니다. 이 시는 그런 역사적 사실과 '밤나무'의 서정을 잘 맞물려 놓은 시입니다. 특히 고도의 시적 계측력이 인상적인데, '묻다'가 '대답을 구하는 것'과 '매장', '밤이 되었다'가 '밤나무 열매'와 '저녁'으로 쓰이는 의미의 혼합 배치가 그러합니다. 이미지에서도 '우물 속 밤송이 몇 개'로 만들어내는 회화적 힘도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