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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봉은 힘이 세다 - 박후기

2004.03.17 11:18

윤성택 조회 수:1446 추천:226

「철봉은 힘이 세다」/박후기 / 《문학판》 2004년 봄호


        철봉은 힘이 세다
        
        폐교에 눈 내린다
        시소는 좀더 어두운
        하늘 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줄 끊어진 그네는 지쳐 보였다
        
        흐린 연필심에 침을 발라
        꾹꾹 눌러 공책 위에 글을 쓰듯
        하얀 운동장에 자국을 남기며
        내가 걸어간다
        얼어붙은 운동장이 책받침 같아
        내 흔적이 땅에 새겨지지는 않는다
        
        눈 덮인 운동장은
        텅 빈 공동화장실처럼 고요하고
        측백나무 울타리 아래
        엉덩이를 반쯤 까고 주저앉는 폐타이어는
        아직도 긴장을 간직하고 있는지
        가벼운 발길질에도 탄력적으로 꿈틀거린다
        나는 가볍게, 무거운 몸을 끌어올려
        물음표를 한 옷걸이처럼
        철봉에 턱을 걸고 매달린다
        철봉은 여전히 힘이 세다
        
        그랬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들은 철봉을 향해 몸을 날렸고
        더러는 외줄을 타는 곡예사처럼
        맨발로 철봉 위를 걸어다니기도 했다
        하루는 올가미에 목이 묶인 개 한 마리가
        철봉에 느낌표로 매달린 채
        매를 맞으며 흔들리기도 했다
        
        눈발은 해마다 폐교를 찾아오지만
        세상의 모든 졸업생들은
        과거로 돌아가는 길을 잊었느니
        
        어느덧 나는 어른이 되어
        철봉 대신 연봉에 매달리며 살아가고,
        바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



[감상]
폐교가 된 모교에 가 매달려보는 철봉, 이 시는 그런 눈 내리는 풍경과 함께 아련한 시절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졸업생들은/ 과거로 돌아가는 길을 잊었느니'의 부분에 이르러 이 시의 직관에 끄덕여져집니다. 그래서인지 곳곳에서 빼어난 묘사 뿐 아니라 사유의 깊이까지 느껴지는군요. 모교에 가서 학교며 운동장이 왜이리 작아졌을까, 생각이 든다면 무릎 굽혀 시선을 낮게 잡고 바라보세요. 추억도 키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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