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 김남극/ 《유심》2003년 봄호
봄날
햇살 깔깔대며 양철지붕을 구르는 봄날
할머니들 식은 밥덩이처럼 모여 앉아 감자 눈 딴다
건네는 말소리에선 가끔
지난겨울 강가 얼음이 천둥처럼 갈라지던 소리들
연일 내리던 눈발이 뒤란을 서성이던 소리들
솔가지 위 눈덩이 사소한 바람에 쏟아지듯
수화기에서 쏟아지던 자식들 물기 묻은 목소리들
비명 길게 끌며 골짜기 끝을 지나 산으로 치달리던
설해목 쓰러지는 소리들, 그렇게 마른 별처럼 진 노인네들 요령소리
이따금 황사 따라 감감하면서 가슴 막히게
두런두런
초승달 양철지붕에 내려 앉히는 소리 속에서
감자 씨눈 트는 소리
잔설 그림자 기웃거리는 개울물 소리 속에서
피라미 지느러미 터는 소리
소리가 소리를 끌고
또 소리를 끌고
[감상]
날씨가 포근한 것을 보니 봄이 산 너머에서 기별을 보내는가 싶습니다. 이 시는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소리'를 발견한 시입니다. 몸도 마음도 다 과거로 부등호가 되어버린 할머니들의 내력을 생각하면 어쩐지 당연하다 싶을 정도입니다. 이 시가 좋은 이유는 이처럼 들리지 않는 것도 들린다고 하는 상상력에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시에서 '감자 씨눈 트는 소리', '피라미 지느러미 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시도 때로는 자연을 듣는 보청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