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파도여인숙 - 안시아

2004.03.08 13:30

윤성택 조회 수:1222 추천:170

「파도여인숙」/ 안시아/ 《다층》 2004년 봄호


        파도여인숙

        
        나는 버림받을 여자가 아니에요
        창문마다 네모랗게 저당 잡힌 밤은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극적이에요
        담배 좀 이리 줘요
        우리 어디선가 본 적 있지 않아요?
        여기는 바다가 너무 가까워요
        이 바다가 정원이라면
        당신은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부자로군요
        이 정도면 나, 쓸만하지 않나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우스워
        다 이해하는 것처럼 고개 끄덕이지 말아요
        밤 밖으로 수평선이 넘치고
        아 이런, 술잔도 넘쳤나요
        지금 걱정하고 있군요 취하지 않았을 때가
        가장 위험할지 몰라요
        *오래될수록 좋은 건 술 밖에 없어요
        갈곳도 없고 돈도 없다고
        내가 유혹하는 것처럼 보여요?
        당신 마음은 어떤가요
        죽고 싶어 보지 않은 사람은
        살았던 게 아니에요
        부서지기 위해 바다 끝으로 밀려온 파도처럼
        이곳까지 떠나온 게 아니던가요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여긴 정말 파도말고는 아무도 없군요
        그런데 왜 자꾸 아까부터
        그 큰 눈을 그리 꿈벅대는 거예요
        파도처럼 이리 와 봐요
        나는 섬이에요
                

        *영화 '마리아와 여인숙'에 나오는 대사


[감상]
혼자서 서해바다에 간 적이 있습니다. 캔맥주 하나 뜯으며 듣던 파도소리, 붉을 대로 붉어진 저녁놀, 등을 기댄 거친 콘크리트 벽, 끝내 돌아가지 못하고 여인숙에 여장을 풀었을 때 한 여자가 찾아왔음직한 쓸쓸한 대화입니다. 시가 온전한 묘사 없이도 의미를 전달해 낸다는 측면에서와, 화자에 의해 시시각각 동요되게 만드는 묘한 기법이 이 시가 끌리는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결미가 말해주듯 바다는 아무래도 상처를 감싸는 여성성에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591 편의점·2 - 조동범 [2] 2004.03.18 1390 239
590 철봉은 힘이 세다 - 박후기 [7] 2004.03.17 1446 226
589 비렁뱅이 하느님 - 정우영 2004.03.16 1147 221
588 새에 관한 명상 1 - 한용국 2004.03.15 1158 202
587 비에 갇히다 - 김영섭 2004.03.11 1327 207
586 도개리 복사꽃 - 박이화 2004.03.10 1263 193
» 파도여인숙 - 안시아 2004.03.08 1222 170
584 모종의 날씨 - 김언 2004.03.07 1154 188
583 순간 2 - 이윤학 2004.03.04 1414 217
582 맡겨둔 것이 많다 - 정진규 2004.03.03 1648 223
581 퍼즐 - 홍연옥 [1] 2004.03.02 1733 264
580 육교 - 최을원 [4] 2004.02.28 1756 193
579 센 놈 - 이진수 [3] 2004.02.27 1229 191
578 낯선 금요일 - 문정영 2004.02.26 1168 177
577 밤나무에 묻다 - 박진성 [3] 2004.02.25 1532 206
576 뒤통수 - 하종오 2004.02.21 1157 166
575 고래는 울지 않는다 - 마경덕 [1] 2004.02.20 1609 226
574 봄날 - 김남극 2004.02.19 1521 194
573 아물지 못하는 저녁 - 이병률 [1] 2004.02.18 1268 180
572 사과야 미안하다 - 정일근 [1] 2004.02.17 1307 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