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여인숙」/ 안시아/ 《다층》 2004년 봄호
파도여인숙
나는 버림받을 여자가 아니에요
창문마다 네모랗게 저당 잡힌 밤은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극적이에요
담배 좀 이리 줘요
우리 어디선가 본 적 있지 않아요?
여기는 바다가 너무 가까워요
이 바다가 정원이라면
당신은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부자로군요
이 정도면 나, 쓸만하지 않나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우스워
다 이해하는 것처럼 고개 끄덕이지 말아요
밤 밖으로 수평선이 넘치고
아 이런, 술잔도 넘쳤나요
지금 걱정하고 있군요 취하지 않았을 때가
가장 위험할지 몰라요
*오래될수록 좋은 건 술 밖에 없어요
갈곳도 없고 돈도 없다고
내가 유혹하는 것처럼 보여요?
당신 마음은 어떤가요
죽고 싶어 보지 않은 사람은
살았던 게 아니에요
부서지기 위해 바다 끝으로 밀려온 파도처럼
이곳까지 떠나온 게 아니던가요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여긴 정말 파도말고는 아무도 없군요
그런데 왜 자꾸 아까부터
그 큰 눈을 그리 꿈벅대는 거예요
파도처럼 이리 와 봐요
나는 섬이에요
*영화 '마리아와 여인숙'에 나오는 대사
[감상]
혼자서 서해바다에 간 적이 있습니다. 캔맥주 하나 뜯으며 듣던 파도소리, 붉을 대로 붉어진 저녁놀, 등을 기댄 거친 콘크리트 벽, 끝내 돌아가지 못하고 여인숙에 여장을 풀었을 때 한 여자가 찾아왔음직한 쓸쓸한 대화입니다. 시가 온전한 묘사 없이도 의미를 전달해 낸다는 측면에서와, 화자에 의해 시시각각 동요되게 만드는 묘한 기법이 이 시가 끌리는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결미가 말해주듯 바다는 아무래도 상처를 감싸는 여성성에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