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 1 - 이성복

2007.08.08 18:07

윤성택 조회 수:1212 추천:129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 1」 / 이성복 (1977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 2007년 《현대문학》 8월호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 1
                - 나무인간 강판권        


        언젠가 그가 말했다, 어렵고 막막하던 시절
        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고
        (그것은 비정규직의 늦은 밤 무거운
        가방으로 걸어 나오던 길 끝의 느티나무였을까)

        그는 한 번도 우리 사이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우연히 그를 보기 전에는 그가 있는 줄을 몰랐다
        (어두운 실내에서 문득 커튼을 걷으면
        거기 한 그루 나무가 있듯이)

        그는 누구에게도, 그 자신에게조차
        짐이 되지 않았다
        (나무가 저를 구박하거나
        제 옆의 다른 나무를 경멸하지 않듯이)

        도저히 부탁하기 어려운 일을
        부탁하러 갔을 때
        그는 또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건 제가 할 일이지요

        어쩌면 그는 나무 이야기를 들려주려
        우리에게 온 나무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무 이야기를 들으러 갔다가 나무가 된 사람
        (그것은 우리의 섣부른 짐작일 테지만
        나무들 사이에는 공공연한 비밀)
        

[감상]
읽고 나서 자료를 좀 찾다보니 이 시의 묘미가 더 새롭군요. 기파랑은 신라 때 승려인 충담사가 지은 향가 찬기파랑가에서 추모되는 신라의 화랑입니다. 이 향가는 기파랑을 절개가 있고 물이나 대나무처럼 자연의 모습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무인간 강판권>은 누구일까. 시의 흐름으로 보아 <나무 이야기를 들려주려/ 우리에게 온 나무>이거나 <나무 이야기를 들으러 갔다가 나무가 된 사람>으로 읽는 이로 하여금 상상력을 자극합니다만, 올 6월에 『나무열전』 책을 펴낸 저자이더군요.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의 추천글을 이성복 시인이 지금의 시와 동일하게 썼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추천글이 시가 된 상황인데, 행과 연을 나누고 괄호를 적절히 사용하니 산문과는 다르게 좀더 깊은 울림이 우러납니다. 제목에서처럼 앞으로 서정에 대한 연작시로 이어질 듯싶습니다. 『나무열전』추천글 마지막 부분을 옮겨 봅니다. <그가 이 책을 썼다. 나무에 대한, 나무로서의 자신에 대한 책, 언제나 조심스런 잎새에 가려 보이지 않던, 그의 곧은 줄기와 민감한 뿌리에 관한 책.>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31 바람막이 - 신정민 [2] 2007.06.13 1303 141
1030 검은 젖 - 이영광 2008.02.12 1221 141
1029 무의지의 수련, 부풀었다 - 김이듬 2007.01.19 1146 143
1028 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 - 고영민 [2] 2008.06.17 1897 143
1027 검은 편지지 - 김경인 2007.07.24 1159 144
1026 녹색에 대한 집착 - 정겸 2007.06.08 1354 145
1025 공중의 시간 - 유희경 2008.12.16 1526 145
1024 얼굴 없는 기억 - 김일영 2003.04.10 1095 146
1023 물의 베개 - 박성우 [1] 2007.04.25 1307 146
1022 밤의 능선은 리드미컬하다 - 문세정 2008.01.29 1328 146
1021 합체 - 안현미 2010.01.06 1029 146
1020 오래전에 잊은 이의 눈썹 - 허수경 [2] 2011.03.15 1813 146
1019 그 집 - 김우섭 2007.06.26 1504 147
1018 타전 - 정영선 2007.07.02 1237 147
1017 혀 - 장옥관 2010.02.12 1757 147
1016 두 번 쓸쓸한 전화 - 한명희 [1] 2003.08.18 1229 148
1015 허공의 안쪽 - 정철훈 [2] 2007.05.30 1508 148
1014 저녁 빛에 마음 베인다 - 이기철 [1] 2007.07.06 1545 148
1013 목단꽃 이불 - 손순미 2003.04.15 1004 149
1012 꿈속에서 아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 - 이진명 2003.05.27 1018 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