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은 음악이 아프고, 나는 그 음에 낫기 직전 상처를 긁는다. 왜 고통의 끝에는 쾌함이 있을까, 망쳐가는 인생 끝에서 웃고만 있는 노숙의 사내처럼. 분노도 기실은 그 어떤 희열과 내통하며 가슴을 치는지도. 우리는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같은 뉴스, 같은 연예인, 같은 희망. 언젠가 이 접속 노력에 의해 지금 현실은 단지 대기(待機)의 공간일 뿐이겠지. 훌쩍 양자역학처럼 어디에도 존재하는 나, 어디에도 부재중인 지구라는 인식체의 일원이 되어가는 건 아닐까 하고. 生은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는 정보에서 클릭하는 순간 명명된다. (페북은 지금 운명과 인연을 알고리즘이라는 산술로 우리를 실험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키운 산만함은 두뇌의 골짜기에서 번개처럼 시간을 훑지만 어디 한 곳에 비를 내리게 할 구름은 없다. 그럼에도 이어폰으로 듣는 이 선율이 방안 고요를 적시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음악이 아프고 몸이 쩐다. 이 고백은, 나 또한 당신의 화소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