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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고 시인

2021.12.01 14:32

윤성택 조회 수:90



첼로에겐 피아노가 있고 피아노에겐 내 귀가 있어

밤이 깊을수록 건반의 눈꺼풀로 떨릴 수 있다

 

비워낸 만큼 가지에 먹구름 들이면

내일밤 혹은 오늘쯤 나무에 흰 눈이 열릴까

그걸 바라보는 눈은 또 얼마나 부시고 실까

 

주르르 흘러내리는 한낮이

시다 시다 오 시다, 풋 눈 한 덩이로

십이월의 행간에 맺혀 있다

 

누구는 그걸 눈꽃이라 하고

누구는 그걸 서리라 했지만,

나무가 흰 이어폰 줄 같은 가지 끝에

잭을 꽂아 공중을 듣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직 책을 덮지 못한 채

피아노 덮개처럼 어떤 종료를 기다리는가 싶다가도

첼로 앞 한 손을 번쩍 든 활처럼 숨을 멈춘다

 

나무가 듣고 있는 바람을 들이고

내가 듣고 있는 음악을 유리창에 끼워 넣는

공백

 

그 틈에도 눈은 계속 내려, 8번과 15번에서

몇 해째 같은 트랙을 돌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나무는 나를 나무라지 않고

나는 나무를 그저 나무라 하지 않아서

 

계절을 지나듯 사람을 지나듯

이루마이거나 유키구라모토이거나 케빈 컨인

음악 속으로 얼마나 많은 가 떠났는지

잊었다가도 왜 가끔씩 뒤돌아보는지

 

겨운 나무는 밤마다 별의 트랙을 돌린다

그 한가운데 단자(端子) 같은 달이 있어

시고 시인 눈소식을 꽂아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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