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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게 쓰는 편지

2022.01.05 15:47

윤성택 조회 수:123



바람이 저물녘을 맡아본다. 이 습기는 오늘밤 눈이 될 것이다. 구름은 예감을 서녘에서 한데 모으고 있다. 눈 내리는 풍경을 보면 아스피린이 생각난다. 아스피린 가루약처럼 내리는 눈. 어릴 적 눈 왔다고 뛰어놀다 돌아온 저녁, 오슬오슬 소름처럼 돋던 오한, 숟가락에 아스피린 가루를 물에 개어 먹여주시던 어머니. 성에꽃 만발한 유리창 너머 해열진통제로 내리는 눈. 나는 그 눈 내리는 동안이 좋았다. 흰 입자의 느린 체공시간이 좋다. 우리가 중력을 견디다 끝내 중력 속으로 분쇄되는 몸이라서일까. 그렇게 바라본 적이 있다. 하늘 가장 높은 곳에 나의 시선이 걸릴 때까지 올려다본 후, 눈 한 송이만 쳐다봤다. 그 한 송이 눈이 어떻게 바람을 가르며 바닥에 떨어지는지 바라보고 있으면, 먼먼 여정에서 내게로 오는 것들을 떠올려보게 된다. 어쩌면 눈발은 엔트로피일지도 모른다. 그 눈송이들의 무질서에서 생의 적설량이 기록될 것이므로. 한때 이었던 시절, 그곳에서 불현듯 박동하는 심장. 그러니 눈이 온다는 건 내겐 두근거린다는 것이다. 혹시, 눈송이처럼 엇갈리고 바람에 흐르는 것이 인연이었을까. 한 번에 그 많은 눈송이가 아니라 단 한 눈송이가 내게 오는 걸 보아야겠다. 손등에서 녹아 흐르지 않고 맺힌 물방울을.

 

창밖의 그림자가 천천히 길어지고 있다. 낮과 밤이 공평하게 교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사는 것이 다 그런 것 같다. 언젠가는 보내야하는 거라고. 이제 거리에는 밤을 더듬던 바람이 한 무리로 몰려나와 누군가 목덜미에 찬 손을 밀어 넣을 것이다. 어깨를 옹송그리는 사이, 탁자의 나이테가 내 손바닥에 대어온다. 한때 이 나무도 어느 산에서 새들을 불러 모았을 거다. 지금 그 하늘에 뿌리내리며 가지를 키웠다는 촉감을 보여주는 거다. 결을 만지면 어느 산에서 불었을 바람이 나이테 무늬에서 불어오는 것만 같다. 그 짙푸르렀던 한때가 어스름을 지워가는 저녁이다. 경건하다. 모니터 받쳐주는 책상 위에 항상 시계를 풀어놓고 타이핑치는 것처럼. 자판 검지에 걸리는 ‘F’을 더듬거리며 커서로 두근거리며. 기지개 한번 하자 어딘가 툭 터질 것 같은 실밥처럼 눈이 내린다.

 

조그만 귤 몇 개째 까면서 엄지손톱 끝 노랗게 뜬 초승달을 본다. 녹차티백을 매단 가는 실을 따라 떴을 수도 있다. 우러난다는 것은 밤으로 점점 어두워 무언가로 깊어지는 거겠다. 지금 밖은, 생각을 한번 눌렀다가 떼어낼 때마다 눈이 쌓인다. 문자메시지 한 글자 한 글자 밟는 소리 따라 이 저물녘 누군가에게 물들 것만 남아서. 무심코 까발린 대로 허옇게 방향을 잡은 귤껍질, 마음 가는대로 이리저리 손아귀를 펴주었다고 할까. 둥글었을 이 귤은 과즙을 쥐고 나뭇가지에서 박스로 덜컹거리는 트럭에 실려 묵묵히 왔을 것이다. 창밖 덤프트럭 한 대, 크릴 새우떼를 삼키듯 눈송이와 눈송이를 집어삼키며 저편으로 사라져간다.

 

눈은 이제 진눈깨비로 가만가만 잦아든다. 눈이었다가 비였다가 몇 번을 망설였다가 진눈깨비가 되었다. 때론 이런 망설임 때문에 아무도 없는 텅 빈 거리가 고즈넉해지곤 한다. 바람이 바람 위로 쌓이고 그 자리에 축축한 습기가 핑 들어선다. 한쪽 귀를 그 저녁에 가로등처럼 켜두고 싶다. 촉수 낮은 불빛 기대어 흰 포장지 같은 커서를 오른쪽으로 떼어본다. 그 여백은 다시 일기가 되어야 하고 일기는 다시 바람이거나 눈발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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