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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오지 않는 오후 - 고영

2009.05.07 11:07

윤성택 조회 수:2109 추천:117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 고영 (2003년 『현대시』로 등단) / 문학세계사 시인세계 시인선 19


        아무도 오지 않는 오후

        이제 아무도 오지 않는 나에게 돌아가련다.
        아무도 없는 오후 다섯 시는 너무 무서우므로.
        블라인드 밖 은행나무엔 불혹이 생의 전부인 햇볕들이 하늘로 돌아가기 위해 분주하다.
        식탁 위 꽃병엔 제 그림자를 먹어치우는 개운죽의 부질없는 자맥질.
        칼날 잎사귀는 오후 다섯 시의 고요를 넘어
        저녁 여섯 시의 적막을 향해 뻗어간다.

        창窓은 언제나
        나와 무관한 경계에 있다.

        너무 오랫동안 창을 닫고 살았다.
        그 옛날 아버지가 심은 포도나무처럼 푸른 잎사귀를 갖고 싶었지만
        내 머릿속엔 항상 늙은 시간만이 누렇게 떠 있었다.
        아버지는 왜 하필 불혹 넘어 나를 세상에 내놓으셨을까.
        - 돌이킬 수 없는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
        태어나면서부터 내 모든 것은 이미 폭삭 늙어버렸으므로,

        내게로 돌아가자는 이 다짐은 오후 다섯 시가 지나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이긴 한가
        아무도 오지 않는 오후,
        낮잠에 빠진 것도 아닌데 자꾸 죽은 아버지가 보인다.
        아버지는 생전보다 더 말이 없다.
        그런데 하필!

        나는 이제 시간을 믿지 않는다.
        푸른 잎사귀는 영원히 푸른 나무의 몫이다.

        
[감상]
아무도 오지 않는 오후 다섯 시는 하루 중 가장 쓸쓸한 시간입니다. 밝았던 사위가 점점 어두워져가며 밤의 여로로 접어들기 때문입니다. 세상 살아가다보면 존재에 대한 성찰이 사무칠 때가 있습니다. 불혹의 나이에 뒤돌아보는 이 풍경은 허위에 차 있거나 시적 포즈의 세계가 아닙니다. 다만 진솔하고 정직하게 나무와 시간과 아버지의 이미지가 겹쳐질 뿐입니다. 결국 다시 나에게로 돌아간다는 건, 눈물겹지만 다시 나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긴 방황을 마치고 시간의 그림자를 이끌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사람, 그리고 마침내 마주친 눈빛. 생경한 내가 나와 만나는 그때. 이 詩 오후 다섯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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