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기
일일달력은 양파껍질처럼 벗겨도 벗겨도 한 여름이었다. 소주 사러
갔다가 난데없이 만난 소나기, 젖은 흙발로 방안까지 따라왔다. 가로
수가 있는 교차로에서 벼룩시장을 지나 온 것이다. 라이터가 젖었는
지 담배에 불이 붙질 않았다. 부싯돌처럼 번개와 천둥이 유리창에 금
을 그었다. 라디오 주파수를 돌려가며 잡히지 않는 희망을 생각했다.
지리멸렬한 잡음 속으로 빗방울이 튀고 있었다. 양철지붕에서 모스
부호처럼 타전되는 것은 막바지 手淫 같은 거였다. 내 청춘은 잘못
옮겨 적은 전화번호였다. 처마 밑 파문은 구인란 볼펜의 동그라미로
번지고 또 번졌다. 흥건하게 젖은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샤워꼭
지 잡고 기도를 했다. 더위는 신앙처럼 깊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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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의 시「무위기」에는 우리 시대 대다수 청년들의 절망과 고통의 신음소리로 가득 차 있다. IMF이후, 우리 나라는 외환 위기도 넘어섰고 경제 성장도 몇 퍼센트 상승하고 있다지만 실제로 우리 경제는 그다지 희망적이지 못하다. 소비 심리는 점점 줄어들고 청년 실업은 해마다 정체되어 그 숫자가 더욱 늘어나고 있다. 부익부빈익빈의 양극단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자신의 청춘을 "잘못 옮겨 적은 전화번호"라는 시적 화자의 외침에 이 땅의 청년 실직자의 깊은 한숨과 절망이 고스란히 옮겨져 있다. 잠결에 샤워꼭지를 붙잡고 기도를 하는 이 웃지 못할 상황의 표현으로 비극은 더욱 증폭된다. 아무런 일도 의욕도 일어나지 않는 '무위기'는 읽는 이의 가슴을 시리게 한다.
-이종암(시인), [경북매일] 8월 23일자-<시로 여는 세상>
올려준 시평모음을 쭈우욱 읽으며...
무위기란 시 참 맘에 들어요
현실적인 아픔이 느껴지고
시가 어렵지 않으면서 느낌이 남아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