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 31일.
이 숫자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까
새삼 마지막이구나 싶습니다.
오늘과 내일 사이 구별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싶고요. 당분간
2004년을 2003년이라고 잘못 쓰고 있을
내가 보이는 것 같고, 내 나이 몇 살일까 문득
셈이 막힐 것도 같고, 누군가 아직? 이라고 물어오면
요령 있게 답해줄 말이 무엇일까 싶고.
가령, 그 빗속에서 내가 돌아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령, 그 편지를 정말 보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생각만으로도 이 시공간은
다운로드 되어 가는 선택 옵션만 같습니다.
이곳의 숱한 기록들을 먼먼 미래는
어떻게 규명할까요. 겹치고 또 겹치는 시간을 들쳐도
만나질 것 같지 않던 인연이
세상 어딘가에서 인과를 기다리고 있다면.
나는 진화하고 있습니다.
뼈와 살로서 지탱하며
내 안에서 조금씩 빠져나가는 시간을
노화로 각인하며
끊임없이 꿈으로 수신하며
나는 조금 더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결국 내가 나를 모를 경우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생을 관통하며
한동안 멍들게 했던 사랑 따위의 것들이,
차마, 지금 내가 앓고 있는 치매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한해동안 고마웠습니다. 지금 새해,
복을 어떻게 드릴까 골몰하고 있습니다.
2004년 12월 31일, 또 다시 이런 고민이
늘 당신만 같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