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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길 위에 서서

2004.06.18 00:46

김솔 조회 수:192 추천:5

“라인홀트 메스너는 유럽 알피니즘의 거장이다. 그는 히말라야에 몸을 갈아서 없는 길을 헤치고 나갔다. 그는 늘 혼자서 갔다. 낭가 파르바트의 8,000미터 연봉들을 그는 대원 없이 혼자서 넘어왔다. 홀로 떠나기 전날 밤, 그는 호텔 방에서 장비를 점검하면서 울었다. 그는 무서워서 울었다. 그의 두려움은 추락이나 실종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짊어져야 하는 외로움이었다. 그 외로움에 슬픔이 섞여 있는 한 그는 산속 어디에선가 죽을 것이었다. 길은 어디에도 없다. 앞쪽으로는 진로가 없고 뒤쪽으로는 퇴로가 없다. 길은 다만 밀고 나가는 그 순간에만 있을 뿐이다. 그는 외로움에서 슬픔을 제거한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외로움이 크고 어두운 산맥을 키워나가는 힘으로 히말라야를 혼자서 넘어가고 낭가 파르바트 북벽의 일몰을 혼자서 바라본다. 그는 자신과 싸워서 이겨낸 만큼만 나아갈 수 있었고, 이길 수 없을 때는 울면서 철수했다.” -김훈, <자전거 여행> 중


[밤의 러닝머신]  윤성택

  바닥은 테이프처럼 검은 밤을 재생한다. 두 다리는 한사코 화면
안이다. 헤드폰 둘러쓰고 빠르고 시끄럽게, 길을 낸다.  이탈하지
못한 길은 지루하고 정직하다. 음악은 환각처럼 템포를 비틀어낸
다. 다운된 러너에게 수건을 던지지 말라, 음악을 다 맞서야 한다.
숨 가쁘게  젖은 몸이 피사체로 흘러간다.  갈림길이 좀처럼 떠오
르지 않는다. 갈 데까지 갔다가 지쳐 내려온 곳이 필생 한 발짝도
아니다. 도망칠 알리바이가 필요하다.  이 생에서 훔친 가죽이 불
룩하다.


김훈이 둥근 몸을 갈아서 길을 만들고 있을 때 윤성택은 러닝머신 위에서 검은 ‘테이프’ 같은 길을 감고 있었던 모양이다. ‘두 다리’는 길을 읽어내는 감각 기관이자 세상이 자아로 넘어오는 다리(橋)이다.(어느 절이고 일주문一柱門의 기둥은 두 개이고 계단은 없고 다리만 있다.) 길을 ‘낸다’는 그의 표현은 오기誤記가 아니다. 왜냐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길의 합은 일정하므로 한쪽에서 감아 줄이면 한쪽에선 풀어 길어지기 때문이다. (‘길들인다’와 ‘길닦다’는 정확하게 거울상으로 겹쳐진다.) 러닝머신 위에서 바흐나 빌 에반스를 ‘빠르고 시끄럽게’ 듣는 건 끔찍하다. (바흐와 빌 에반스를 테이프로 듣는다면, 또는 ‘맞선다면’, 비명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끊임없이 ‘갈림길’을 만들며 파열하는 소리씨만이 ‘지루하고 정직한 길’에 풍경을 심는다. 그러나 그 씨앗 속에서 자라는 건 ‘숨 가쁘게 젖은 몸’이 없는 ‘환각’이 전부일 따름이다. 환각에는 ‘한 발짝’의 발자국도 찍힐 만한 ‘알리바이’가 없다. 그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러너’는 끊임없이 고개를 숙여가며 디지털신호를 확인해야 한다. (환각은 디지털 신호로 계량화된다, 아니 문명인들은 그렇게 믿는다. 그래서 아날로그 신호 대신 디지털 신호가 선호된다.) 그 속도로 그 거리를 달리는 그 시간 동안 몇 칼로리의 환각이 몸에 쌓인다. (속도를 올리면 시간이 부족해지고 정량의 칼로리를 채우려면 거리는 길어진다.) 그래서 ‘생에서 훔친 가죽은 불룩’해지는 것이다. (풍선을 떠올려 보시라. 채울수록 가벼워진다. 그러나 그 가벼움의 열락에는 한계가 있다.) 거울의 ‘화면’은 무한한 총구로 실존의 이유를 겨눈다. 길짐승들은 숨을 곳이 없다. 산탄에 맞은 ‘수건’ 한 장이 공중에서 천천히 떨어지며 주홍글씨로 씌어진 이름 하나가 ‘떠오른다.’ 불안감은 몇 그램의 땀으로 길 속에 스미고 ‘이탈하지 못한 길’은 반복된다. 나는 지금 도망치고 있는 게 아니다. 아주 평범한 방식으로 길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
며칠 전 러닝머신을 뛰다가 문득,
쓰고 싶은 문장들이 떠올랐는데,
다음 날 형의 시가 죽순처럼 자라나는 바람에 무릎을 쳤습니다.
멀리서 누군가와 교감할 수 있다는 사실은,
특히 그가 시인이라면,
황홀한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히 형의 시를 잘라 옮깁니다.
용서하시길......

2004.6.18 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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