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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전입신고서 - 이선이

2002.11.06 10:05

윤성택 조회 수:914 추천:185

감나무 전입신고서/ 이선이/ 199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감나무 전입신고서


        마당 가
        엊그제 입주한 감나무
        허공만 바라고 서서
        가난한 집 아기 젖빠는 소리를 내며 꽃을 피워 올린다  

        달빛은 전입계 직원처럼 무심히 도장찍고 가고
        바람은 섬처녀 가슴으로 한 번 안겨보고는 부끄럼 타는
        발소리 내며 달려나가고

        봄밤
        아이 알림장처럼 매일 열어보는 창문 위로
        가지들 뻗어줄까, 내 창은
        저 꽃잎들 무슨 사연으로 받아들까
        궁금해 하고

        잎잎이 내려선 별빛들
        전입신고서 쓰고 가는
        밤,

        여기는 살만한 나라가 아니라고, 참사(慘事)에 아이 잃고  
        이민(移民)간 친구에게
        죽은 아이가 여기 감꽃으로 피었다고는
        꽃피니 이별도 견딜만하다고는 도저히 쓰지 못하고

        일찍 떨어진 열매가 남기고 간  
        햇빛이며 달빛 받아
        시퍼런 멍들 온몸으로 열매되어 가리라고,    

        썼다 지우는
        흰감꽃 속 애기 무덤 하나  



[감상]
감나무 한 그루에서 이렇게 많은 우리네 세상살이가 있었다니, 시가 주는 즐거움입니다. 자연의 것을 사람의 것으로 환치시키는 솜씨도 좋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서사도 울림이 깊습니다. 전입신고를 하고 나면 운전면허증이나 주민등록증 뒷장에다가 또박또박 주소를 적어줍니다. 그 주소에서 사는 거지 싶어서, 겨울 가지뿐인 나무에게 넌 무슨 나무냐? 이름이 뭐냐니깐, 말해! 헤드락을 걸지 않아도 봄에 어김없이 제 주소로 찾아오는 새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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