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모래씨앗」/ 김수우/ 《시와사람》2004년 여름호
저, 모래씨앗
3억8천만년전 곤충화석에서 나온 꽃가루, 공룡의 등에 비늘지
던 빗방울, 숲을 나서던 원시인의 맨발, 천둥과 고요, 동굴벽에
그려진 암사슴과 빗살무늬토기, 유목민의 별똥별까지 이제 모
두 비밀이다 몸을 헐어 사막이 된 것들 소멸은 무수한 고독의
씨앗을 낳았다
푸른 초원이 붉은 사하라가 될 때까지
사막은 얼마나 눈시린, 슬픔의 유전인자를 숨기고 있는 걸까
바람부는 대로 이동하는 구릉을 넘어, 영원한 환영을 품은 가
시나무를 따라, 오랜 여행을 살아남은 것들 마음을 헐어 사막이
되었다 설화를 찾던 옛 탐험가의 낮달까지 모래비가 되어 초침
으로 타오르고 있음이여, 먼 내일도 날카로운 고독의 씨앗만 낳
을 것이다
[감상]
한 문장 한 문장 읽고 있노라면 초원이 사막으로 변해 가는 풍경이 느껴집니다. 모래를 '씨앗'으로 보는 시인의 직관이 이 시의 백미입니다. 사막을 '슬픔의 유전인자'로 보는 것이나, '마음을 헐어 사막이 되었다'라는 의미도 새롭습니다. 그렇지요, 아주 오래 전 살았던 모든 것들이 몸을 헐어 모래가 되었겠지요. 그래서 사막에 휘몰아쳐 부는 바람소리조차 오랜 것들의 목소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최근 이처럼 큰 스케일의 시는 처음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