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길상호/ 《문학세계사》(근간)
집들의 뿌리
어디로 이어졌는지 아직 다 걸어보지 못한
골목들은 거기 감자처럼 달려 있는 집의 뿌리였다
이제야 알게 된 것이지만 골목은
기쁨과 슬픔을 실어 나르던 체관과 물관이었다
다 허물어져 알아볼 수도 없는 이 집에 들어
대문을 열고 드나들었을 사람들 떠올려보면
지금은 떨어져 버린 기쁨과 슬픔의 열매가 보인다
막 화단에 싹틔운 앵두나무에는 나무를 심으며
앵두꽃보다 먼저 환하게 피었을 그 얼굴이 있다
마루에 앉아 부채질로 하루를 식히다가 발견한
그 붉은 첫 열매는 첫입맞춤의 맛이었을까
그러나 저기 마루 밑에 버려진 세금고지서 뭉치,
대문에 꽂힌 저 종잇장을 들고 앉아 있는
그의 얼굴에는 누렇게 변색된 나뭇잎 하나 걸려 있다
체납액이 커질수록 가뭄처럼 말라가던 가슴은
지금도 금 간 흔적을 지우지 못하리라
어쩌자고 골목은 나를 빨아들여
사람도 없는 이 집에 데려다 놓은 것일까
오래도록 먼지와 함께 마루에 앉아 있으면
내가 드나들던 집에 나는 기쁨이었는지 슬픔이었는지
물기 잃은 잎처럼 시들해진다
[감상]
골목을 '뿌리'로 바꿔내는 발상은 서정이 뛰어난 식물성 집을 만들어내는 은유로 마무리됩니다. 무엇을 달리 볼 것인가라는 측면에서 이 시는 삶과 기억을 '집'이라는 메타포에 강렬하게 응집시켰다고 할까요. 쓸쓸하게 버려진 빈집에 앉아 고요함에 마음을 내맡기는 풍경이 눈에 선합니다. 시집 곳곳 자기 성찰에서 오는 따뜻한 발견이 감동적인 시집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