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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의 역사 - 권혁웅

2005.10.13 16:20

윤성택 조회 수:1446 추천:226

《마징가 계보학》 / 권혁웅/ 《창비》시인선 (근간)


  밀실의 역사
                  집 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안다는 말이
                 참으로 거짓이 아니로구나. (이곡 「소포기」)

  1. 사막

  방에 위도와 경도를 매겨, 지상과 일대일 축척을 실현
한 이모에 관해선 방금 말했다 외할머니가 부를 때마다,
이모는  고비 사막을 넘어  달아났다  대상도 낙타도 없
이……그곳을 건너가는 데 한 뼘이 걸렸다

  2. 벼랑        
        
  형은 여름 한낮이면  다락에 올라가 오수를 즐겼다  가
끔 벼락 치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면 디딤판 위에서
코피를 흘리며 코를 고는 형이 있었다  거기가 낙화암도
아닌데, 형은 삼천 번 정도는 몸을 날렸을 것이다

  3. 전장

  주인집 작은형은 평생을 그늘에서만 산 군주였다 형의
유일한 적수는 나였다  형은 기병과 포병과 보병과 전차
와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내게 쳐들어왔다 나는 자주 말
발굽에 밟히거나 코끼리와 수레바퀴에 깔려 신음했다

  4. 탑

  우리는 주인집 막내를 동장군(冬將軍)이라 불렀다 한밤
에 변소에 갔다가  구멍에 빠졌던 애다  한겨울이어서 그
애는 똥탑을 기어올라  방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우리는
그 애를 피해다녔다  추위와 똥독을 이겨낸  불굴의 장수
였으므로

  5. 식당

  주인집 작은누나는 가출한 후에  도루코 면도날 위에서
위태롭게 청춘을 보냈다 한번은 면도칼을 씹다가 주먹에
맞아  입 안이 통째로 날아갔다 한다  그래서 삼양라면을
한 올씩 삼키며 두 달을 살았다 입이 좁은 문이었던 거다


[감상]
지금은 재개발구역이 되어버린 성북 삼선동 산동네에서의 80년대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시집입니다. 시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슬픈 즐거움이랄까요, 개성 있는 인물들이 담백하게 행간을 채워옵니다.  <권혁웅이 작성한 기억의 계보학은 유쾌하고 비통하고 아름답다>로 맺음하는 해설도 인상적입니다. 시집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인물 내력을 완성해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1. <이모>는 <이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영어선생을>하다가 <충북 괴산의 어느 마을로 시집을 갔는데, 고된 시집살이 일 년만에 친정에 돌아와>, 넓은 마당 옆 국수집 <제 방에 성채를 쌓>은 인물로 <방 구석구석에 캘리포니아, 오페라 하우스, 리우 데 자네이루, 흑해, 타클라마칸……등의 글씨를 새겨넣>고 들여다보는 독특한 취미의 소유자.
2. <형>은 <코피를 흘리며 코를 고는> 기막힌 행동으로 보아 <아버지가 작은집에서> 데려온 뚱뚱한 셋째 형일 가능성이 큽니다. <형은 말도 하지 않았고 학교에 가지도 않았>고 <밤중에 앉아서> 노는 걸 즐기는 스타일, <연탄가스를 마셨다>는 군요.
3. 유일하게 놀아준 <주인집 작은형>은 스물일곱 해를 골방에서만 살았는데 그 이유는 <볕을 쬐면 온몸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때문.  희귀한 유전병 포르피린증(한참 찾았습니다)인 것 같습니다. 곡기를 끊고 세상을 떠났군요.  
4. <동장군>의 기록은 찾질 못했습니다. 혹 아시는 분?
5. <주인집 작은 누나>는 <삼선교 칠공주 가운데 넷째>였군요. <첫째와 셋째는 미아리 파와 영역싸움을 하다 병원에 실려갔고 둘째는 같은 날 도망쳤다가 제명되었으며 다섯째는 덜컥 임신을 했고 여섯째는 가출해서 연락두절이었으며 일곱째는 개과천선>했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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