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기 굽는 사람>/ 최승철/ 《창작과 비평》 2005년 겨울호
토기 굽는 사람
위성 안테나를 설치하는 기사의 손은
유연하게 전선을 끊어 단자에 접지 시킨다
가스렌지를 점화하자 중심은 뚝배기를 감싸고
제 몸짓에 놀라 더욱 푸르러지며 불길을 연다
고층 아파트에서 투신한 가장家長은
나사를 돌리는 방향으로 밤하늘에 조여들며
빠른 속도로 우주에 휘감긴다
접점에 선 기사의 등에서 땀이 흐른다
가스불은 견고하게 뚝배기에 닿는다
베란다에 안테나를 고정시키자
중심은 허공을 향해 주파수를 찾는다
자신의 피가 불에 닿아 구워지는 것을
단단하게 앓아야 피가 물을 담아낼 수 있는
불의 용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토기 굽는 사람은 알았을 것이다
중심을 잡아당기며 오목해진 토기에서
물 한 방울 불로 건져 올릴 수 있을까?
뚝배기에 닿던 푸른 불길로 토기 굽던 손길이
찌개를 감싸 안으며 보글거린다
위성을 찾으려는 안테나의 방향으로
수위는 깨진 유리창을 모으고 있다
바람은 떠나가는 쪽에서
자신이 긋던 흔적을 지운다
[감상]
<위성안테나>와 <뚝배기>는 상식적인 측면에서 보면 유사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눈을 통해 재발견해낸 비유에서는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위성안테나가 <허공을 향해 주파수를 찾는> 방식으로 에너지를 유입한다면, 뚝배기는 가스레인지를 통한 <푸르러지며 불길을 여는> 바닥면의 <중심>에서 에너지를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해 소통의 경로는 <위성안테나>가 전파를 끌어들이는 방식이나, <뚝배기> 바닥이 열을 받아 끓이는 찌개의 방식이나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는 안테나를 다는 기사의 작업 장면을 투신한 <가장>이나 <토기>로 견고하게 잇대어 놓습니다. <고층 아파트에서 투신한 가장家長은/ 나사를 돌리는 방향으로 밤하늘에 조여들며/ 빠른 속도로 우주에 휘감긴다>, 이 빼어난 표현은 위성안테나의 조립장면과 가스불이 켜지는 작동장면에 절묘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이렇듯 파격적이고 엉뚱한 비유에서 오는 자유로운 사고가 진정한 시적감응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