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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빚을 받다 - 정진경

2005.12.20 13:56

윤성택 조회 수:1671 추천:238

<전생 빚을 받다>/ 정진경(200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 《시와정신》2005년 겨울호


        전생 빚을 받다
        
        가위로 절단한 탯줄 저편에 있는
        전생이, 어느 날 나를 찾아 왔다

        모퉁이를 돌던 버스가 휘청하는 순간
        접어둔 우산에 고인 물이 그에게로 튕겼다
        ─ 전생에, 제가 빚진 것이 있나 봅니다
        박꽃 웃음 환하게 피우던 그의 얼굴
        계산하지 못한 전생 연(緣)을 무심결에
        그는 보았던 것일까
        곡각 지점에서 길을 잃은 나를 다시
        사람 속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를 잠시 만났다
        버스에서 내리지 전, 짧은 2분
        온몸을 간질이는 알레르기 웃음 꽃 피게 하는
        떠올리면 병리학적 증세를 일으키는
        그를 만났다

        몸이 있으므로 업(業)이 있고
        업(業)이 있으므로 몸이 있다
        그에게서 받은 전생 빚은 내가 갚아야 할 몇 겁의 빚,
        삭제되지 않은 전생 인연들이 기록된
        차용증서였다

        그날 이후 나는,
        모르는 사람이 내 발을 밟으면
        내밀하게 숨긴 마음 창을 살짝 열어 두고
        ─ 전생에, 제가 빚진 것이 있나 봅니다
        하며 전생 빚을 갚는다

        둥그런 배꼽에 묶어둔 전생 빚, 그에게서 받다  
        

[감상]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남의 신발을 밟거나 밟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 시는 그러한 상황에서의 '전생 빚'이라는 우스갯소리를, 진지한 시인의 세계관으로 이어갑니다. 막연한 관념인 '전생'을 '탯줄'의 묘사로 구체화시키는 것이지요. '가위로 절단한 탯줄 저편'은 현실과 전생을 오가는 중요한 연결지점입니다. 영혼은 육체의 사망 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며, 태아에 이르러도 마음 즉 전생의 인연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출생한다는 건 태아가 모체에서 분리되어 세상에 나오는 것이어서, '절단한 탯줄'은 그야말로 아득한 과거와의 절연을 의미합니다. 이 시의 재미는 과연 어떤 '빚'이 살아가면서 때때로 누구의 모습으로 나에게 드러날까 라는 상상력에 있습니다. 기억나지 않는 변제를 생각하면,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다 겪는 사랑이나 상처도 상계(相計)처리인 걸까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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