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싹>/ 김지혜/ 《문학과창작》2005년 가을호
싹
한 계절이 가고 한 계절이 오는 사이
비닐봉지 안 감자들은 서로를 억세게 부둥켜안았다
어른 손가락만큼 자라난 독(毒)줄기로 전생까지 끈끈히 묶었다
물컹한 사체에서 기어나와 처절히 흔들리는
아직 나 죽지 않았소, 우리 아직 살아 있소
생명 다한 모체를 필사적으로 파먹으며
비닐봉지 안의 습기와 암흑을 생식하며
저 언어들은 푸르게 살아남았다
싹 난 감자알을 창가에 올려놓으며
본다, 한 계절이 가고 한 계절이 오는 사이
나를 비켜간 저 푸른 인연의 독(毒)
[감상]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검은 비닐봉지 속에 감자들이 있습니다. 한 계절이 가고 한 계절이 오도록 방치된 그 봉지 속에서, 살아남은 <감자>의 묘사가 강렬합니다. <비닐봉지 안의 습기와 암흑을 생식>하는 그 질긴 생명력은 존재의 경외감마저 갖게 합니다. 제 몸을 파먹으며 사투를 벌이는 처연한 2연의 목소리가, 그동안 나를 잊고 존재 의미마저 잊고 살아가는 우리네를 소름 돋도록 일깨워주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