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의 숲』 / 노춘기 (2003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 《서정시학》 시인선
그믐이었다
고개를 쳐박고 오래 물밑을 들여다보는 사내
도무지 얼굴을 들어올리지 않았다
물때 낀 스티로폼 조각이 그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해가 지고 있었다 그의 등 위로 어둠이
수초 더미처럼 촘촘해졌다
비로소 그를 호흡하게 한 어떤 구멍이 물 아래 있어
환한 구멍 속에 코를 쳐박고 웃고 있었는지
하류를 향해 천천히 이동하는 식은 몸 주위로
검은 비닐들이 웅성거렸다
강폭 가득 그믐이었다
[감상]
죽음이란 지척의 다른 공간이라 해도 되겠습니까. 그저 눈으로 보지 못하고 육체로 느끼지 못하며 정신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곳이겠지만, 하나의 공간에 있되 내가 아닌 것, 그 어떤 지속적인 세계가 아닙니까. 죽은 사내가 엎드린 채 강의 하류로 떠내려 갑니다. 현실은 이처럼 남루한 저녁이지만 죽음 저편에서 시시각각 조립되는 풍경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의 소재들은 사내의 생을 에워싼 공허에 반응하는 물질들입니다. 스티로폼조각, 수초더미, 검은 비닐들… 어둠에 잠겨있는 우주의 어느 밤이 강폭에 입혀져 있는 듯 이미지가 강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