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 전에도 여기 있었다」 / 임동확 / 2003년『시와 정신』여름호
나는 오래 전에도 여기 있었다
누가 이 깊은 밤 핸드폰 벨을 다급히 울리나
나 한 순간도 수꿩 울음 끊이지 않은 사월의 뒷동산
금세 피었다 지는 개나리꽃이나 그 울타리 아래
수줍게 고개 내민 제비꽃처럼 그렇게 너와 함께
질긴 그리움의 천을 짜며 노래하고 있었거늘
누가 슬피 울며 어디로 날 찾아다니는가
네 집앞 은행나무 사이 나트륨 가로등처럼 그렇게
곧잘 술 취해 담벼락을 더듬으며 귀가하곤 하는
너의 모습을 가만 지켜보며 여기까지 왔거늘
아, 그러나 어느새 이리 늙고 병들고 눈먼 것,
오늘 다시 너와 마주앉아 오래 아파하는 것
그 어떤 몸짓 하나 너와 무관하지 않거늘
급기야 그 누가 잠긴 방문을 차고 들어오려는가
피할 수 없는, 피해갈 수 없는 세월 속에서
오래 전에도 나는 여기 있었고,
앞으로도 차마 떠나지 못해 여기 남아있을 것이거늘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오직 너는 나의 너였거늘
[감상]
술 취해 담벼락을 짚고 돌아오는 새벽, 시인은 자기 안의 '나'를 발견해냅니다. 그 분열된 자아는 참 낯설고 슬픈 것이어서 연민이 가득하고요. 이 시가 좋은 점은 이렇듯 단순한 서정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담아내는 서사를 시의 추진력으로 삼는다는 점입니다. 실은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오직 너는 나의 너였거늘'의 결미에서 등장하는 자아를 보고 놀랐습니다. '너'와 '나', 그리고 '나의 너'가 이 시속에서 조용하게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쓸쓸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임동확. 참 괜찮은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