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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방들 - 김혜순

2004.05.08 19:11

윤성택 조회 수:1564 추천:215

「환한 방들」/ 김혜순/ 《동서문학》2004년 봄호

        
        환한 방들

        복사기가 일초에 한번씩
        해바라기를 토해 내고 있다
        잠시 후 돌아보니 방안 가득 해바라기 만발이다
        어찌나 열심히 태양을 복사했던지
        고개마다 휙 젖혀진 해바라기 꽃밭 사이
        평생 늙지도 않는 소피아 로렌이 걸어 나올 것 같다

        나의 복사기, 네모난 환한 상자
        나는 복사기 안으로 들어설 때마다
        피라밋 투탄카멘에서 출토된 미라처럼
        가슴에 품었던 검은 꽃다발을 공기 중에
        산화시키며 미소를 날린다
        밥해서 먹이고 웃겨줘야 할 입들이 들어찬 방
        외풍과 한숨이 들락날락하는 환한, 나의 방!

        일초에 한번씩 불 켠 복사기가
        내 몸을 밀었다 당겼다 할 때마다
        들숨은 들어가고 날숨은 나온다
        지하철 4호선 긴 의자에 앉은 내 얼굴이
        복사된 얇은 종이가 벌써 수억만 번째
        희미한 빛 속에 가라앉고
        원본은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내 얼굴
        이미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내가
        또 한번의 출퇴근 궤도를 그리고 있다

        집에 돌아오면 마멸이라는 이름의 비누로 얼굴을 씻고
        마멸이라는 이름의 크림으로 얼굴을 지우고
        오늘 밤 복사된 내가 철(綴)해진
        스프링 노트를 힘껏 찢어 버린다
        과연 나는 내 몸에 살고 있는 걸까
        마지막으로 복사되다만 내 미소가 떠 있는
        환한 방의 스위치를 내리면
        복사기 네모난 상자도 어두워지고
        내 몸도 관(棺) 속처럼 어두워진다

[감상]
복사기를 기능적 묘사에 그치지 않고 화자와 방, 더 나아가 관으로까지 치닫는 상상력이 족히 오늘 시탐(詩貪)을 해갈시켜줍니다. 개인적으로는 3연의 직관에 섬뜩할 정도의 울림을 전해 받습니다. 복사기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지하철 역과 역 사이에서의 빛으로 환치시키다니요. 기계화된 우리의 일상에서 복사기의 의미는 이렇듯 1초라는 삶의 시간성과, 끝없는 자기복제라는 음울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관 속으로 하루하루 업데이트해가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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