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행」/ 이진수/ 《시와정신》2004년 여름호
파행
그때 나는 십 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중간에 교통사고 소식만을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준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양 5일장 어물전 한 귀퉁이
꽃게 파는 아주머니의 다라이에서는 게들이 물 밖으로 나오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저만치 평화기물상사 앞에서 나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사내 하나 보였다
사내는 바퀴 달린 널빤지 위에 뽕짝이 흘러나오는 녹음기와 집게발만 남은 몸을 얹은 채 파행파행 오고 있었다
평화기물상사에서 가고파키센터 영화식당을 거쳐 어물전까지 오는 동안 사내는 내가 만나려던 모습에서 십 년 더 나이든 얼굴이 되어 갔다
이게 얼마만이냐 사고 소식은 들었지만 설마 이럴 줄은
덤프트럭에 깔려 두 다리 잘랐다 그나저나 손 한 번 잡아보자
녀석은 손에 끼고 있던 반코팅 장갑을 벗으려 했다 엊물전 꽃게 비린내가 확 풍겼다 아냐 안 벗어도 돼 녀석의 불편보다 비린내를 묻히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왜 기는 모습이 껄쩍지근하냐 내 딴엔 카누 선수 노 젓는다 생각한다
아냐아냐 그래야지 그럼 포기하지 말아야지 막걸리나 한 잔 하자
영화식당에 들어가 생각보다 가벼운 그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부인은 잘 있냐
병원 생활할 때 사고보상금 챙겨 갖고 날라버렸다
얘들은
어머니가 키우시지
둘이 막걸리 네 주전자를 비웠을 때는 날이 이미 저물어 있었다 다음에 또 보자 녀석은 자신의 카누를 타고 곧장 노 저어 가는데 나는 똑바로 걷지 못하고 자꾸만 비척거렸다
그로부터 일 년, 녀석은 가끔씩 전화를 하고 나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파행을 계속하고 있다
[감상]
시를 읽고 감동을 전해 받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이 시의 경우는 사고 당한 친구와의 만남을 통해, 그 친구에게서 느껴지는 측은함 너머 불편함을 대리 체험하게 해 성찰을 물려받는 경우겠지요. 시골장터에서 불행을 견뎌내는 친구의 건실한 모습이 '카누'로 형상화되지만, 시적화자는 막걸리 네 주전자에 취해 똑바로 걷지도 못합니다. 아마도 이 부분이 이 시의 주제적 맥락을 꿰뚫고 있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또 사전적 의미에서의 파행(爬行)과 파행(跛行)을 넘나드는 마무리는 이 시의 소재적 한계를 넘어 깊이를 더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