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국영」/ 서동욱/ 《세계의 문학》2004년 봄호
장국영
1
천사는 난간으로 올라갔다
남길 말을 찾았으나
머리가 저금통처럼 쩔렁거리며
잘못 만들어진 주화 같은
엉뚱한 단어들만 사방으로 흩어졌다
발 아래서 벙어리처럼 펄럭이는 호텔의 만국기
아, 지금은
단 한마디의 대사도 써먹을 게 없구나!
2
그해 여름
대성학원 근처의 동시 상영관이 일제히
영웅본색을 올릴 때
나는 대학에 갈 마음은 없었지만 그 계집애를 보러 빠짐없이
학원에 나갔네
노량진
돌아가고 싶지 않은 동네
노선버스와 떡볶이 포장마차와 담배꽁초가
세상 마지막 수챗구멍처럼 꽉 막힌 곳
정거장마다 두 개 꼴인 동시 상영관
맨 뒤에 앉으면 흰 복면 쓴 빈 좌석들이 지평선에 일렬 맞춘 KKK단처럼
장관인 곳
그해 여름
복면 쓴 좌석들 너머에서,
치지직 비 내리는 화면이 끊어질 때마다 씨발씨발
욕을 해대는 재수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천사는 한 자루 총을 들고
순교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듯
구룡반도의 구름 아래를 천천히 걷고 있었네
3
천사가 사랑했던 남자들을 생각했다
꼭 친구와 붙어서 학원 문을 나서던 그 계집애처럼 뜻대로 안 되는 연인
담배 연기 꽉 찬 극장 휴게실
표지가 떨어진 주간지들, 흠집 난 바둑판, 대걸레가 훔치고 가기 무섭게
빈 바닥에 선명하게 뱉어놓은 가래침
그때 거기를,
무엇을 생각하러 찾아갔던가?
그 계집애 쪼금, 그리고 솔직히 아주 약간 대학에 대해서?
그러나 여덟, 아니 아홉 정도는 정말 어떻게 죽을까 하는 생각…
구룡반도의 태양이 축성해 주는 가운데 오만하게 죽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못 죽으면 결코 죽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았다
마흔여섯의 생일날 아침,
아이들에게 선물받은 넥타이도 매보고
생일 케이크 앞에서 돼지처럼 잘 먹고 잘 싸다가,
동시 상영관에 앉아 있던 소년을 우연히 기억해 내고는
그의 유치찬란함이 자기 것이었다는 데
쑥스러워하리라…
(천사는 난간 위에서 잠깐
놀란 듯이 자기 나이를 헤아려보았다
어이없고, 불공정했다)
4
그리고 오랜 뒤에 그 여자를 만났다
내가 자기를 좋아했다는 것도 잊은 듯 말을 걸어왔다
이제 여행사 단말기 앞에 앉아 쉴새없이 말을 쏟아내는 상담을 하면 홍콩이건
대만이건 아주 싸게 가는 법도 알게 되었다
그래요?
되물으면서 나는 아주 잠깐 비행기 탈 생각을 했다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사라지는 동안
구룡반도에 떠 있는 구름들이 햇살을 받으며 오래도록 게으름 피우는 광경이 떠올랐다
내가 놓쳐버린 축성받은 죽음
그리고 어디선가, 아주 서글픈 노랫소리도 들려온 것 같은데,
어느 영화에서였는지 끝내 기억해 내지는 못했다
5
배우가 죽던 날
경야經夜하는 수녀들처럼
노량진의 학원들 앞에선 오래도록 담뱃불들이 깜박였을 것이고
조문객을 내려놓고 또 태우고 가는 긴 시내버스의 행렬이
밤늦게까지 도로를 막아섰을 것이고
취한 재수생들은 술집 문을 잡고 통곡했으리라
이 모든 가련한 밤들을 불빛 꺼진 눈길로 내려다보며
천사는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개를 폈다
놀란 눈처럼 부릅뜬 호텔 창문이 오래도록
중력의 묘기를 응시했다
[감상]
홍콩 영화배우 장국영의 자살을 큰 축으로, 화자의 과거 재수생 시절, 그리고 ‘그녀’에 대한 짝사랑이 잔잔하게 녹아나 있습니다. 신과 인간의 중개자인 천사의 모티브도 죽음을 또 다른 의미로 승화시키는 중요한 장치입니다. 인간의 천사에 대한 선망은 어쩌면 ‘날개’에 대한 것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땅에 떨어질 때까지 속도에 내맡긴 몸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그가 출연했던 아비정전의 대사가 떠오르는군요. ‘죽을 때는 뭐가 보이는지 항상 궁금했어. 나는 눈을 뜨고 죽을 거야.’, 그는 기념적으로 죽었고 세상은, 또 다른 천사를 높은 곳으로 올려 보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