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동물도감>/ 박판식/ 《문학판》2005년 여름호
상상동물도감
회백색의 집들이 어둠과 힘겹게 맞서 싸운다
인간의 동네에선 나무들이 귀찮다는 듯이 자란다
나는 더 이상 어린 날처럼 잠 잘 때조차 아름답지 않다
인간에게는 왜 말이라는 게 생겨났을까 식물과 달리
인간의 입술은 참으로 못생겼다
시계는 부동자세로 오므라든다 달력은 9월에서 멈췄다
여우를 숫자4를 발가락으로
그리고 새를 그리다
신을 그릴 수 없어 슬펐다
어른들이 잡아온 노루의 갈라진 발굽에서 쉴새없이 피가 쏟아졌고
20년 후 피가 멈추지 않아 붕대를 쉴새없이 갈아대는 여자를 만났다
인간이라는 속임수, 동물과 인간을 분별하는 생물도감에 질렸다
어쩌다가 약삭빠르게 자살이라는 단어를 배웠다
돌고래는 인간과 닮았다 사람들은 돌고래에 흥분한다
그러나 하나는 땅속으로 또 다른 하나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단념은 하나의 능숙한 기술이다
심사숙고하는 따분한 백과사전을 덮는다
[감상]
<인간이라는 속임수>, 우리가 의식적으로 세상을 분류해내는 행위들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군요. 못생긴 <입술>로 소통케 하는 이 체제가 세상을 상투적 틀 안에 가둬 놓은 것은 아닌지 <따분한 백과사전>을 통해 전달됩니다. 여느 시인과는 다르게 박판식式 시를 눈여겨보게 되는데요,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의 심적 상황을 실재와 거리 둠에도 불구하고, 묘한 이끌림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직관이 배인 여자의 생리와 여우, 방향감각을 잃은 고래의 자살도 서사의 맥락과 잘 어우러지고요. 표현의 상투성이나 도덕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의식을 표현하려는 실천적 행보를 지켜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