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결한 배치》/ 신해욱/ 《민음사》시인선 (근간)
섀도복싱
거기 있다는 걸 안다.
빈틈을 노려 내가 커다란 레프트 훅을 날릴 때조차 당신은 유유히 들리지 않는 휘파람을 불며 나의 옆구리를 치고 빠진다.
크게 한 번 나는 휘청이고
저 헬멧의 틈으로 보이는 깊고 어두운 세계와 우우우, 울리는 낮게 매복한 소리.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완악한 힘에 맞서 당신을 안아버리는 이 짧고 눈부신 한낮.
부러진 내 갈비뼈 사이의 텅 빈 간격으로 잠입하는 당신에 대해
당신의 그 느린 일렁임에 대해
나는 단지 말하지 않을 뿐이다.
천천히 저녁이 열리면
이 헐거움을 놓치지 않으며 길고 가늘게 드러나는 당신.
빈틈을 노려 내가 복부를 공격할 때조차 당신은 정확히 내 팔 길이만큼만 물러서며 나를 조롱한다. 당신이
거기 없다는 걸 안다.
[감상]
섀도복싱은 몸 푸는 준비과정을 거친 후 거울을 보며 원투, 어퍼컷, 훅 등의 동작을 취하는 자세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거울을 보며 혼자서 움직이는 복싱이지요. 그래서 이 시의 <당신>은 <나>의 또 다른 이름인 셈입니다. 결국 <당신>은 정체성에서 분열된 자아의 모습이거니와, 거울 속에 투영된 자신의 표현입니다. 집요하게 풀어내는 동작이 생생해 흥미롭고, 있고 없고를 판단하는 처음과 끝이 명료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