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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한 체류 - 김명인

2005.09.22 10:47

윤성택 조회 수:1303 추천:214

《파문》/ 김명인/ 《문학과지성사》시인선 (근간)



        무료한 체류

        한 이틀 머물자고 했던 계획이
        나흘이 되고 이레를 넘긴다고 해서 조바심칠
        일이 아니다 파도 위에 일정을 긋는
        설계란 쉽게 틀어지기도 하므로
        저렇게 초원을 건너왔더라도 허옇게 거품 뒤집는
        누떼의 사막에 갇히면
        기린 같은 통통배로는 어김없이 며칠은 그르쳐야 한다
        자진이 아니라면 종일 바람 길에나 서서
        동도도 서도도 제 책임이 없다는 듯
        풍랑에나 원망을 비끄러맨 채 민박집을
        무료하고 무료하고 무료하게 하리라
        출렁거리던 나날의 어디 움푹 꺼져버린
        삶의 세목들을 허허로운 수평으로 복원하려 한다면
        내 주전자인 바다는 처음부터 이 무료를
        들끓이려고 작정했던 것
        행락은 끊겼는데 밤만 되면 선착장 난간 위로
        별들의 폭죽 떠들썩하다 밤 파도로도 한 겹씩
        잠자리를 깔다 보면 하루가 푹신하게 접히지
        그러니 뿌리치지 못하는 미련이라도 너의 계획은
        며칠 더 어긋나면서 이 무료를
        마침내 완성시켜야 한다 지상에서는 무료만큼
        값싼 포만 또 없을 것이니!

        
[감상]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고 철썩였던 파도가 생각나는 시입니다. 여행이 그러하듯 우리는 항상 계획적으로 살아가지만, 가끔은 이런 열없고 허허로운 것들에게 붙잡히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유연하게 '초원'과 '사막', '주전자'로 이어지는 사색의 상상력에서 시인만의 정제된 표현을 느껴봅니다. 얽매인 일상에서 벗어나, 비가 억수로 와 오도 가도 못할 곳에서 한 며칠 무료와 필담이라도 나누고 싶은 날입니다. 그 열망을 만지작거리며 시집의 <시인의 말>을 덧붙여봅니다.
  
두어 달 엄동을 바닷가 시골집에서 야산의 고사목을 잘라 군불 지피며 갯바위에 올라 낚시나 하면서 살았다. 저녁 늦게까지 들리지 않던 파도 소리가 자정 넘겨 점차 스산해져가는 것을, 잠귀에 고여 오면 뒤척거려 쏟아버리곤 했다.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그 비몽사몽간에 내 자각을 세워두었던 것 같다. 애써 의식하지 않았으므로 이 적요 길게 이어질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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