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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전 오늘 골몰한 생각들

2001.12.18 20:34

윤성택 조회 수:214

* 정확히 일년 전이군요. 2000년 12월 18일,
지금도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아릿함.
김솔의 글과 저의 댓글입니다.

      

서류 정리를 하다가 종잇날에 손가락을 베었습니다. 하얀 살이 벌어지고 수줍은 나리꽃처럼 붉은 피가 느리게 피었습니다. 몽롱한 통증도 잠깐, 순해 보이는 서류의 종잇장에도 날이 있다는 게 놀라워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글이 걸어가야 할 붉은 길을 생각합니다.
잘 쓴 글이란 잘 벼린 칼처럼 서슬 퍼런 날을 품고 있어서, 억압하고 최면을 걸고 생명을 줄이는 모든 권력으로부터 불순한 허위들을 잘라내어야 하며 벌거벗은 자아와 부조리한 세상이 종잇날 위에서 진검승부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다짐과 더불어, 독서 행위를 통해 값싼 동정과 감동과 교훈을 기대하는 독자들을 얼음이 덮인 호수 속에 빠뜨리고 숨이 목에 걸릴 때까지, 그래서 작가의 의도나 목소리 따윈 철저하게 무시되고, 오로지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내어 삶과 화해하고 위무하게 될 때까지 다리를 붙잡고 호수 바닥으로 빠져드는 물귀신이 되는 불온한 꿈을 꿉니다.
장정일의 일갈처럼, 싸움을 걸지 않고서 어떻게 글을 쓴단 말입니까. 당신의 눈물과 회한은 글 쓴 이를 절망시킬 뿐입니다.
해서, 또 제 글에 절망합니다. 언제쯤 절망 위에다 순수한 소망만으로 글을 쓸 수 있을까요? 종잇날에 손가락 열 개가 모조리 베어 나갈 때쯤이면 가능할까요? 도대체 왜 글을 쓰는 걸까요? 적어도, 누군가는 이렇게 말해주길 바랍니다. 당신을 간절하게 절망시키고 싶어서 펜을 들었다고. 그렇다면, 기꺼이 바닥까지 내려가 허우적거리며 생이 새어나가고 있는 상처를 찾아 보듬을 수 있을 것을. 그러니, 절망하고 싶지 않을 땐 책을 덮는 수밖에. 차라리, 서류 뭉치의 종잇날에 매일 자해하는 편이 글을 쓴 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는지.
마음에 상처가 생겨서 잠시 주절거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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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병을 돌리다가 손가락을 베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젊음을 담보로 마실 수 있는 치기였을까요.
피를 덥히기 위해
피를 흘린 묘한 아이러니.

생각해보면 삶이나 글이나 칼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양칼날이 되기 쉽상입니다.
무모한 자기를 베고 더러는 타인을 베기 쉬운 상처의 칼날.
대개 그것이 우리들 살아온 날들의 쓰린 모습은 아닌지요.

신문삽니다. 라고 장난 전화했다가는
칼 맞기 좋은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