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원』 / 김기택 / <창작과비평사>
봄날
할머니들이 아파트 앞에 모여 햇볕을 쪼이고 있다
굵은 주름 가는 주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햇볕을 채워 넣고 있다
겨우내 얼었던 뼈와 관절들 다 녹도록
온몸을 노곤노곤하게 지지고 있다
마른버짐 사이로 아지랑이 피어오를 것 같고
잘만 하면 한순간 뽀오얀 젖살도 오를 것 같다
할머니들은 마음을 저수지마냥 넓게 벌려
한 철 폭우처럼 쏟아지는 빛을 양껏 받는다
미처 몸에 스며들지 못한 빛이 흘러 넘쳐
할머니들 모두 눈부시다
아침부터 끈질기게 추근대던 봄볕에 못 이겨
나무마다 푸른 망울들이 터지고
할머니들은 사방으로 바삐 눈을 흘긴다
할머니 주름살들이 일제히 웃는다
오오 얼마 만에 환해져 보는가
일생에 이렇게 환한 날이 며칠이나 되겠는가
눈앞에는 햇빛이 종일 반짝거리며 떠다니고
환한 빛에 한나절 한눈을 팔다가
깜빡 졸았던가 한평생이 그새 또 지나갔던가
할머니들은 가끔 눈을 비빈다
[감상]
봄날 아파트 앞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포착한 시입니다. 햇살을 개체화하고 거기에서 드러내는 낱낱을 '채워 넣'는다든지, '양껏 받는다'든지의 묘사로 드러냅니다. 또 놀라운 것은 '깜빡 졸았던가 한평생이 그새 또 지나갔던가'라는 生을 훌쩍 뛰어넘을 직관에도 있습니다. 아마도 관찰의 힘이 이 시를 지탱해주는 에너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둘러보면 온통 詩가 삶을 받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