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自閉)」/ 예현연 / 2004신춘문예당선시집, 《문학세계사》 2004
자폐
아침이면 나팔꽃이 보랏빛 입술을 벌리는 집
침침한 방 안에서 아이는 혼자다
모래 상자 둘레를 빙글빙글 돈다
장난감을 파묻는다
문 틈으로 아이를 엿보곤 하는 눈동자
하나, 둘, 셋
모래 속에는 백 개의 눈이 달린 물고기
저쪽에는 외눈박이 늑대 인간
저쪽에는 눈알이 빨간 까마귀들
모두모두 묻어버리자
입술을 비틀며 미소짓는 괴물들에게 모래를 뿌리자
오후의 나팔꽃이 잠든 소년의
어린 성기처럼 도르르 말려 늘어진 집
그 넝쿨에 가려진 창문이 흔들릴 때마다
잎의 뒷면, 창백한 엽맥들이 툭툭 불거지고
어두워지는 방 안
아이는 모래 속으로 파묻히는 중이다
[감상]
단편영상처럼 아이의 이미지가 선명한 시입니다. 자폐증은 주위에 관심이 없어지거나, 남과의 공감·공명을 느낄 수 없어 말을 하지 않게 되는 증세로 자기 세계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그런 심리적 묘사가 물고기, 늑대, 까마귀로 형상화되고, 결국 아이가 소외되는 현실로 되울려 나옵니다. 어렸을 적 조립식 로봇 하나로 피웅, 슝슝, 으악… 이런 단어가 소통의 코드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지금, 얼마나 내 세계를 당신에게 드리웠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