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노래를 듣다」 / 이성목 / 시집《남자를 주겠다》
옛날노래를 듣다
낡은 전축 위에 검은 판을 올려놓는다
전축은 판을 긁어 대며 지나간 시대를 열창하지만
여전히 노래는 슬프고, 잡음은 노래가 끝나도록 거칠다
소란스럽던 시절의 노래라서 그런 것일까
마음과 마음 사이에 먼지가 끼어서 그런 것일까
몇 소절은 그냥 건너뛰기도 한다 훌쩍 뛰어 넘어
두만강 푸른 물이 삼각지 로터리에 궂은 비로 내리고
눈보라치는 흥남부두로 소양강 처녀가 노 저어 가기도 하면서
경계와 경계를, 음절과 음절을, 이념과 이념을
덜컹 뛰어넘는 저 몇 개의 세선들
한때 우리가 그렇게 노래를 불렀던 것처럼
노래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낡은 전축이 요동을 친다
긁히고 패인 한 시대를 털커덕 털커덕 넘어서며
판을 뒤집자고
이젠 뒤집어 노래하자고
[감상]
낡은 전축에서 분화되어 가는 의식의 흐름이 흥미롭습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LP판에서 CD로 세상도 점점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억은 항상 현재가 불러내는 편집된 과거이어서 아련함이 더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옛날 노래에서 이렇게 자유로운 상상력이 있다니, 한 행 한 행 따라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