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 조정인 / 《시작》시인선 37 (근간)
빗속에서 나는 건너편과 화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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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가 돌아간다 퍼지에 놓은 세탁기가 잠잠해질 무렵
남자가 젖은 풀밭에 떨군 손수건처럼 고즈넉해진다
스스로 당긴 방아쇠에 무릎이 꺾인, 남자의 잔등엔 탄흔이 나 있다
탄피 널린, 정사 후의 침상이란 썰물 뒤의 해변 같은 것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는 건너편 풍경 속엔 새잎이 피고 있다
초록빛 죽음이 도처에서 왕성한 세포분열을 거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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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제 세공품끼리 엷게 부딪는 듯한, 잠의 언저리를 밟는
새소리에 새벽귀가 아슴프레 밝는다
우기중의 맑은 날이란 물 속 은화와 같아
창밖엔 시리도록 흰빛이 쌓였을지 모르겠다
찻잔이 식탁유리에 또옥, 하고 닿는다
커피를 입에 댔다 놓는 한 행보 사이 나비처럼 날아 앉은 오전
담 밑 돌팍을 한 장 들어낸다
개미들이 흩어지고, 벌거벗은 흙 위로
빗줄기 무수한 빗금무늬가 훑고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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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를 받고 차들이 멀어진다 순식간에 생긴
길 건너, 란
얼마나 막막해지는 공간인가
하늘이 주춤대더니 이내 도로에 비가 넘친다
꽃씨처럼 길가에 떨궈진 채
하늘로 열린 동공에 빗물이 넘친다
공중전화부스 앞에서 반음에 걸리고 마는,
내 안의 검은건반이 길게 운다
발아래 노을이 떠가고 흠씬 젖은 나비가 떠간다
건너편 상가 불빛들이 금잔화처럼 깜박인다
내게 화해를 청할 누가 있어
비 내리는 화면 위로 오래도록 투영되는
바다 밑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피아노, 거대한 은유
[감상]
기다리던 시집이 나왔습니다. 한 편 두 편 보다보면 아예 시리즈로 묶어 갖고 싶은 시들, 그런 의미에서 조정인이라는 시인의 첫시집은 표지처럼 핑크빛 아련함입니다. 오전 무렵부터 시작되는 고요한 일상의 단면을 이 시는 자의식이라는 테두리에서 잔잔한 필치로 보여줍니다. 첫연 '총'의 메타포, 그리고 땀이라는 탄흔, 물결처럼 구겨진 침대보 등의 의미망은 커피잔을 받치고 창밖을 바라보는 여인의 한 컷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화해라는 소통은 첫 번째 씬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복선을 갖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