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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를 잡다 - 권지숙

2007.05.29 17:58

윤성택 조회 수:1268 추천:166



[그림 설명] 알루미늄 박지에 긁어 그리고 유채로 메움, 10×15cm, 1952년 무렵으로 추정.

<게를 잡다> / 권지숙 (1975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

  게를 잡다

  아무도 없다 깜깜하게 닫아놓은 커튼 틈새 먼지 사이를 비집고 도둑처럼
  눈 희번득이며 햇살 한줄기 집안으로 들어온다 날카로운 햇살을 피해
  웅크리고 눈 크게 뜨고 앉아 벽에 걸린 이중섭의 게…… 아무도 없다
  게 한 마리 작은 눈 빛내며 액자 밖으로 다그락 다그락 기어나온다
  뒤따라 한 마리 또 한 마리…… 순식간에 마룻바닥을 다그락 거리며 게들이
  기어 다니는 소리 아무도 없다 깜박이지도 못하고 크게 뜬 눈 오므린 발가락
  위로 게들이 흘린 눈물거품 한 방울 또 한 방울…… 눈물바다 속을 다리 걷고
  들어가 게를 잡는다 아무도 없다……


[감상]
아무도 없다, 숨죽인 고요 속에서 그림에 빛이 닿는 순간 이 시는 놀랍게도 활력으로 충만해진다. 달그락거리는 게의 움직임이 텅 빈 거실에 소름 돋듯 스멀거린다. 이렇게 간결하게 묘사되는 <게>의 움직임은 매우 감각적이다. 시적 테크닉은 <햇살>에서 <액자>로 <마룻바닥>으로 이어지며 매끄럽게 전환된다.
권지숙의 「게를 잡다」를 읽고 있노라면 그 은밀함 끝으로 스르르 빨려든다. <다리 걷고 들어가 게를 잡는> 그 기막힌 상상에 푹 빠져 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시가 열어놓은 독특한 세계에 매료된다고 할까. 밀폐된 거실 커튼 틈으로 햇볕이 비춰올 때 그림은 새롭게 현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내면의 근원적 풍경에서 촉발된 상상의 힘이자, 실체의 상식을 허물고 만들어낸 존재의 공간이다.
이 시에서 반복해서 쓰이고 있는 〈아무도 없다〉는 훔쳐본다는 관음의 영역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화자는 <아무도 없다>고 말하지만 기실 그 시선 너머에는 독자의 눈이 있다. 이렇게 타인의 시선을 열어놓은 은밀한 설정은, 독자의 시각적 쾌감을 배가시키는데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화자가 모르는 그 시선에 내가 동참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동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눈물바다 속을 다리 걷고/ 들어가 게를 잡는다 아무도 없다>에서 호흡과 맥박이 빨라지는 이유는 껍질 속 연하고 부드러운 살이 가득한 게를 차지한다는 공범(?)의식이 공유되기 때문이다.
예부터 게는 단백질이 많고 맛이 좋아 중요한 식품으로 취급되어 왔다. 만일 이 시가 이러한 연상 코드와 벗어나있다면 게를 잡는 동기는 개운치 않아진다. 그러나 잘 익은 게의 통통한 분홍 속살과, 알이 실하고 담백한 간장게장을 떠올려본다면 생각이 달라진다. 이렇듯 이 시는 은밀한 욕구를 그림 속 게를 통해 파악하고 묘사하고 승화시킨다는 점이 독특하다.
이중섭은 1916년에 출생하여 1956년에 병으로 세상을 등진 파란만장한 삶을 산  화가이다. 그 당시 전쟁의 역사가 그러하듯 가족과의 이별, 좌절과 이루지 못한 꿈이 점철된 그의 일대기는 미술사에서도 종종 회자되는 얘기다. 식민지 시절 일본유학에서 부유한 일본인 집안의 딸과 결혼하고 우여곡절 끝에 1952년 1년여 머문 피난의 흔적이 이 시의 <그림>이고 액자이다.
당시 이중섭이 머물렀다는 제주도 서귀포 셋방 집은 아내와 어린 아들 둘과 함께 살기에는 너무나 작은 1.4평 단칸방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나 먹을 것이 없었던지 게와 조개가 주식이 될 정도였다. 후에 부인의 술회에 의하면 이중섭은 매일 잡혀오는 게에게 너무 미안한 나머지 그 영혼을 위로해주기 위해 <게>를 주제로 한 그림을 자주 그렸다고 한다. 당시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의 캔버스는 담뱃갑 속에 들어 있는 은박지였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편 후에 연필이나 철필 끝으로 눌러 그림을 그렸다. 아마도 시인은 이런 이중섭의 극빈한 삶을 생각하며 <게들이 흘린 눈물거품 한 방울 또 한 방울>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누구나 삶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보고 싶어 한다. 그 열망이 공간과 시간을 넘나들며 사라진 무언가를 불러내고 현실화시킨다. 그것은 상상이어도 좋고 기억이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이를 촉발시키는 원인이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라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중섭 그림 속 <게>가 생명을 얻는 현상은 소중한 시인의 발견이다. 영혼의 심연에서 길어올린 현실이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이고 아름다운 형상으로 표현될 때 그것은 시인의 불후의 형식으로 살아남는다.
「게를 잡다」에서 보여준 상기의 힘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 그리고 여전히 흘려보내고 있는 시간에 대한 극복과 모색이다. 그래서 저 바글거리는 <게>들의 풍경 속에서 투사되는 진실은 고상한 성찰이나 포즈 같은 깨달음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살아 있고 숨질 하고 세상과 더불어 생활하고자 하는 순수한 삶의 애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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