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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그린 그림...

2001.08.19 15:29

어떤이면 조회 수:239




당신과 만난 첫해는
당신의 잠이 되고 싶었습니다.
쉽게 잠들지 못한다던,
미쳐버리게 글도 안된다던,
당신의 그 불면의 밤에
나 은밀히 숨어들어
당신도,
피나게 끌어내던 당신의 문학도
내 안에서 편히 쉴 수 있으면하고
안타까이 바랬습니다.
바램은 뿌리를 내리고,
바램은 줄기를 만들어
당신이 모르는 사이
나는 당신을 향해서만 얼굴을 내미는
아침 창 나팔꽃을 피워내었습니다.

당신을 만난 두째 해는
당신의 글이 되고 싶었습니다.
내 꼴랑한 일상이
당신의 연금술에
금이 되고, 금강석이 되어
빛처럼,
번개처럼,
당신이 나의 머리에 그렇게 꽂았듯
자랑처럼
다른 사람의 머리에 나를 꽂아 주길 바랬습니다.
당신이 모르는 사이
그 은근한 바램은
꼭꼭 숨어 들어
꽃잎새 하얀 찔레가 되어 있더이다.
자디 잔 가시도 달려 있더이다.

당신과 만난 세째 해는
당신의 아기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내 튼튼한 자궁안에서
움을 내고, 싹을 터
꼭 당신과 나 반반씩만 닮은
건강한 사내아이를 잉태하고 싶었습니다.
쓸데없는 짓이라 했나요.
당신과 나의 아기가
겨우 쓸데없는 짓이라
당신의 한마디 말에
죽어 버렸을 때
난 내 화단의 대추나무 밑에
그 아기를 묻었습니다.
그 아기 내 눈물 마시고 다시 태어나
작은 꽃을 피웁니다.
바람만 불어도 앙앙 울어대고
비만 와도 칭칭 보채어
당신 모르게
나 혼자 그 아길 가꾸느라
몰래 몰래 가꾸느라
바람만 불어도
비만 내려도
나 그렇게 허둥 허둥
내 한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네,
단지 그래서였습니다.
바람만 불어도..
비만 내려도..

당신과 만난 네째 해는
당신과 내가 만든
이 작은 화단에
나 당신을 묻습니다.
당신은
오감을 굳게 다물어
검은 선으로 눕고
나 이제
커다란 한 삽 떠
다시는 뿌리도 내리지 못하게
커다란 두 삽 떠
다시는 풀씨도 못 앉아 버리게
그렇게
붉은 흙을 뒤집어 버립니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그 삽질은
내 무릎을 짓찧고,
내 팔을 꺽어 내어
나 또한
연초록 진물을 내며
이렇게 눕습니다.
비가 내려
푸른 핏물을 씻기고,
바람이 휘돌아
상처를 마르게 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말들합니다.
지금의 상처는
훗날 내 얼굴에 밝은 그늘을 만들어 줄 거라고...

당신
오늘 나 당신을 묻습니다.
우리의 꽃자리 밑에 당신을 묻습니다.
어디 당신만 묻었나요
더이상 피지 못할 내 사랑도 묻어 버린 걸.
뿌리까지 파헤친 걸요.
풀씨조차 못 앉는 걸요.
이렇게
세월은 죽고 만걸요.


그림 - 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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