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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아홉, 기형도 서울생활

2001.08.23 17:04

윤성택 조회 수:212

* 이 글은 순서만 조정해 놓았을 뿐, 전부 기형도 시집의 글귀들입니다.






서울생활이란 내 삶에 있어서 하찮은 문장 위에 찍힌 방점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은 좋은 곳이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쳐주니까. 덕분에 나는 도둑질말고는 다 해보았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일까.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生 속에 섞여 들었다. 솔직히 나의 얼굴이 한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주어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었다.

"서편 하늘 가득 실신한 청동의 구름떼여. 목책안으로 툭툭 떨어져내리던 무엄한 새들이여. 쓴 물 밖으로 소스라치며 튀어나오던 미친 꽃들이여. 나는 알 수 없는 질투심에 휩싸여 너희들을 기다리리.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지금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러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도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 밭에 힘없이 걸려 있다. 저 달빛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제가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트럭이 정거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침묵은 그러나 얼마나 믿음직한 수표인가? 내 나이를 지나간 사람들이 나에게 그걸 가르쳤다. 콘크리트처럼 나는 잘 참아왔다.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 볼 것인가?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결국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그러면 종종 묻고 싶어진다. 나의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망치기 위해 가엾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흙탕물 주위를 나는 기웃거렸던가!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나의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내 생의 주도권은 이제 마음에서 육체로 넘어갔으니 지금부터 나는 길고도 오랜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내가 지나치는 거리마다 낯선 기쁨과 전율은 가득차리니 어떠한 권태도 더 이상 제 혀를 지배하면 안되리라.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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