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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편지에 대한 그리움

2003.11.14 00:55

이나☆ 조회 수:192 추천:4

전공이 문예창작인지라..
문예비평 수업을 듣는 도중, 과제로 주유소란 시를 비평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실력이 많이 부족하고 분석보다는 감상에 가깝지만..
시인에게 그래도 이렇게 느꼈노라고 보여주고 싶어 올립니다..
윤성택 시인의 팬이 한 명 늘어난 것 같네요..^-^*

주유소

                             윤성택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 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 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길을 떠나야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



  연애편지란, 참 그 이름만으로도 그리운 이름이다. 시인은 주유소에 들렸다가 느닷없이 연애편지를 떠올리는데, 이는 나에게도 그리운 추억을 상기시켰다. 편지란 보내는 사람의 마음이 담긴 물건이다. 물건이랄 수 있을까. 마음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형태로도 만져볼 수 없고 눈으로도 볼 수가 없는 게 마음인데, 편지가 마음 그 자체가 될 수 있을까.

  내게 주유소는 아버지의 차를 타고 기름 넣으러 들리는 곳이었다. 아직 나는 운전면허증도 없고 차도 없어서 주유소에 갈 일이 전혀 없기 때문에 주유소에 대한 애틋한 기억은 하나도 없다. 시인 역시 이 시를 주유소에 대한 애틋한 기억으로 인해 쓴 것이 아니리라. 단지 주유소에 들림으로 인해 시인의 삶에 대한 여로를 되짚어보게 된 것뿐이리라.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 새끼손가락 걸 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 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단풍나무 그늘은 늦가을을 연상시킨다. 주유소가 기다림의 끝이 될 수 있을까. 차를 굴려 기름이 바닥난 상태에서 도로를 헤매다 비로소 만나게 되는 장소가 주유소이긴 하다. 그것이 기다림의 끝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돌고 돌아, 지겹게 헤맨 후에야 만난 장소. 기다림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만난 곳에서 주유기가 자동차의 끝에 걸려 양식을 먹듯 기름을 먹고 그의 시에는 이미지가 동반된다. 행간에 서서히 차 오르는 숫자들. 시인은 무얼 기대한 것일까. 다시 헤맬 일없이 기운을 차린 자동차가 그를 어디까지 데려다 줄 수 있을까. 그리고 시인은 다시 되돌아 올 수 있을까. 약속같은 건 할 수 없다. 어디까지 갈지도 모르고 돌아올지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는 약속이란 무의미하다. 약속이란 지켜져야 한다는 전제하에 행해지는 것인데, 지켜지지 않을 거라면 그건 어떻게 약속을 해야할지 모르니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길을 떠나야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예전에 어린 나이에 남자친구를 사귄 적이 있었다. 사귄지 얼마 안되어 입대를 했고 그렇게 군대에서 발신된 편지를 받게 되었다. 항상 그의 편지에는 서명이 있었다.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그것은 곧 젊음이 아니던가. 그의 편지의 말미에 항상 써져있던 서명은, 나에게는 일종의 추억거리가 되었다. 그가 그의 서명으로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싶어했고, 우스개 소리로 그 서명이 없는 편지는 자신이 쓴 게 아니라던 말이 나에게는 아픔의 상징이었다. 군대에서 자신의 존재가 휴지조각보다도 무의미해질까봐 염려했던 것이었을까. 새삼 그의 부재가 아쉬워지는 지금이다.

  돌이켜보면 그 때가 나에게는 시인이 말한 함부로 불질렀던 청춘같다. 담배 끝자락에 걸려지는 불이 없었더라도 얼마든지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게 라이터였고 불길이었다.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인가. 휘발성, 불붙이면 날아가는 존재.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기는 연기와 재는 마음 언저리에 직인처럼 새겨져있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

  급할수록 돌아가란 말이 있다. 어디를 가든 처음 가보는 길은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길을 잘못 들어 헤매고 방황이라도 하게 되면 조급해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느긋한 마음으로 길을 가다보면 곧 깨닫게 된다. 그렇게 걸어간 길이 제일 빠른 길이었고 지름길이었다는 것을.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는 것을. 다만 우리가 사는 세상과 시간이 바쁘게 흘러가느라 정지되어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하고 그리워만 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시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리운 것들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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