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의 추억』/ 윤병무/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찰나의 화석(化石)
나는 몰랐다
그때의 기타 소리가 십일 년이 지나서
꽃 한 잎을 떨어뜨리며
현기증처럼 흔들리는 봄바람 같은
공명(共鳴)으로 다가올 줄이야
세상의 바깥엔 빛이 있었고
그 중심의 자리엔 갑작스런 정전 같은
귓전의 쇳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 노래를 기억하지 못한다
한 사람의 응시는 나를 뚫고
푸른곰팡이가 핀 벽지 위에
나의 안면을 판박이하였다
나는 판박이의 얼굴을 손톱으로 긁었다
다 자라난 손톱 사이로 파고들어
때 낀 그날은 오래도록 빠지지 않았다
추억이란 마모되면
수만 년이 지난 어느 날의 또 다른 이름,
어느 어두운 방의 방사선이 들여다보는 찰나의 화석(化石)
그때에도 누군가 쓸쓸한 웃음을 지을까?
어쩌랴 그날은 지나갔다
이름을 갖지 못한 행성(行星)이 먼 훗날,
우주를 한바퀴 돌아오는 날을 기다리든지 아니면
지구가 궤도를 이탈해 그 시간(時間)의 이름을 찾아가든지
[감상]
'추억이란 마모되면/ 수만 년이 지난 어느 날의 또 다른 이름'에 이르러 한참을 머뭅니다. 혹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수만 년 전 동굴에 벽화를 그려 넣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던 눈빛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먼 훗날 내 유전자가 고스란히 전달될 어느 사내의 쓸쓸한 눈으로 마음을 전송시키는 중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