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킹 속의 세상/ 서안나/ 『문학마을』2002 가을호
스타킹 속의 세상
스타킹을 신을 때면
잘 풀리지 않는 세상일처럼 조잡하게 말려 있는 두 가닥의 길. 풀기 없이 뭉쳐져
있는 길들. 그 길속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면 망사그물처럼 단단하게 조여오
는 아픈 기억들.
스타킹을 신을 때면
열 손가락에 힘을 주고 잡아당기면 뱀 아가리처럼 순식간에 내 몸을 삼켜버리는
탄력적인 길들. 위험스런 길속엔 함정처럼 꽃들이 피고 지고 꽃잎에 진딧물처럼
얹혀진 푸른 골목길. 푸른 골목길에서 누군가가 담장에 기대어 조급하게 기침을
한다. 기침소리처럼 쏟아지는 꽃보다 습한 기억들. 골목에선 사람들이 잠 속에서
도 두 눈을 감지 못한다. 검은 내장을 우우 떨며 담장들이 목덜미가 하얀 여자를
뱉아 낸다. 절벽처럼 각이 진 얼굴이 낯익다. 슬픈 내력을 지닌 무성한 소문들이
골목 안에 가득 들어찬다. 여자의 슬픈 발걸음이 낙타 발자국처럼 따뜻한 담장 안
에 고요하게 찍힌다. 발자국마다 길들이 열린다. 길들이 여자를 휘감는다. 꽃잎들
이 여자 목덜미에 서둘러 피어난다. 스타킹을 신다보면 꽃처럼 붉은 길들이 망사
그물처럼 단단하게 조여온다.
[감상]
스타킹을 신어본 적은 없지만 이 시를 읽으면 스타킹으로 드러나는 상상력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 촘촘히 살을 그물질하는 망사가 이처럼 세상을 달리 보게 하는가 싶기도 하고요. 가끔 거리의 복면한 다리들보다는 국민학교 시절에 보았던 맨다리 숭숭한 누나들이 좋았던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