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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앞 능소화 - 이현승

2002.12.03 11:14

윤성택 조회 수:1252 추천:174

그 집 앞 능소화/ 이현승/ 2002년『문예중앙』겨울호 신인상 당선작 中



        그 집 앞 능소화



  1.
  이를테면 제 집 앞 뜰에 능소화를 심은 사람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이다. 여름날에,
우리는 후두둑 지는  소나기를 피해 어느집 담장 아래서 다리쉼을 하고,  모든 적막
을 뚫고 한바탕의 소요가 휩쓸고 갈 때,  어사화같은 능소화 꽃 휘어져  휘몰아쳐지
고 있을 때,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그 집의 좋은 향기에 가만히 코를 맡기고 잠시 즐겁다.
  능소화 꽃 휘어진 줄기 흔들리면,
  나는 알고 있다. 방금 내가 꿈처럼, 혹 무엇처럼 잠시 다녀온 듯도 한 세상을.

  2.
  말걸어 오지 않는 세상을 향한 말걸기.
  언뜻언뜻 바람을 틈타고 와
  확, 뿜어져 나오는 향기란
  아무것도 예비할 수 없었던 도난사고처럼
  툭, 어깨치며 떠난 자에게서 후발되는 것.
  뒤숭숭한 꿈자리처럼
  파편적으로만 나타나는 기억 속에서
  징후로만 읽혀지는 것.
  그러나, 감추어진 것을 향한 나의 짐작은 두렵다.
  다 익었다는 것 속엔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다.
  열매도 없는 화초의 지독한 향기.
  급소를 중심으로 썩어가는 맹독성
  혼기 지난 여인처럼
  꽃은 향기 속에 늘 부패의 경고를 담는다.

  모든 향기의 끝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감상]
능소화 너머의 발견, 그리고 자신만의 생각의 융화, 시적대상과의 소통. 이렇듯 이 시는 여러 생각을 오가게 만듭니다. 간간이 드러내는 직관도 좋고요. 몇 년 전부터 신춘문예 최종심에 올랐다가 사라진, 이 시를 이제야 보게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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