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 앞 능소화/ 이현승/ 2002년『문예중앙』겨울호 신인상 당선작 中
그 집 앞 능소화
1.
이를테면 제 집 앞 뜰에 능소화를 심은 사람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이다. 여름날에,
우리는 후두둑 지는 소나기를 피해 어느집 담장 아래서 다리쉼을 하고, 모든 적막
을 뚫고 한바탕의 소요가 휩쓸고 갈 때, 어사화같은 능소화 꽃 휘어져 휘몰아쳐지
고 있을 때,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그 집의 좋은 향기에 가만히 코를 맡기고 잠시 즐겁다.
능소화 꽃 휘어진 줄기 흔들리면,
나는 알고 있다. 방금 내가 꿈처럼, 혹 무엇처럼 잠시 다녀온 듯도 한 세상을.
2.
말걸어 오지 않는 세상을 향한 말걸기.
언뜻언뜻 바람을 틈타고 와
확, 뿜어져 나오는 향기란
아무것도 예비할 수 없었던 도난사고처럼
툭, 어깨치며 떠난 자에게서 후발되는 것.
뒤숭숭한 꿈자리처럼
파편적으로만 나타나는 기억 속에서
징후로만 읽혀지는 것.
그러나, 감추어진 것을 향한 나의 짐작은 두렵다.
다 익었다는 것 속엔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다.
열매도 없는 화초의 지독한 향기.
급소를 중심으로 썩어가는 맹독성
혼기 지난 여인처럼
꽃은 향기 속에 늘 부패의 경고를 담는다.
모든 향기의 끝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감상]
능소화 너머의 발견, 그리고 자신만의 생각의 융화, 시적대상과의 소통. 이렇듯 이 시는 여러 생각을 오가게 만듭니다. 간간이 드러내는 직관도 좋고요. 몇 년 전부터 신춘문예 최종심에 올랐다가 사라진, 이 시를 이제야 보게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