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소멸·40 / 박제영/ 1992년 <시문학>으로 등단
푸르른 소멸·40
- 즐거운 놀이
딸아, 가을 숲에 가자꾸나
마침내 충분히 살았다 이윽고 지고 있는 것들 보여주마 물이었으니 물로 돌아가
고, 흙이었으니 흙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모르겠어요
딸아, 가을 숲에 가자꾸나
후툭 후투툭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빗소리, 바람소리, 낙엽소리, 벌레소리, 새소리, 짐승의 울음소리
들려주마 마침내 모든 소리
허이 헤이허 오호호호 오 오행, 만가(輓歌)로 화음됨을
모르겠어요 무서워요
가엾은 것 두려워하지 말거라 이것은 숲이 겨울을 준비하고 봄을 맞이하는 즐거
운 놀이란다 언제고 아빠도 가을 숲이 될 것이야 그러니 딸아, 그때가 되면 슬퍼
할 일이 아니라 오늘 이 놀이를 기억해야 할 것이야 즐거운 놀이를
모르겠어요 자꾸 눈물이 나와요 이젠 집에 가고 싶어요
[감상]
이 혹독한 상영관 안에서, 지독히 빛과 입자로 명멸하는 시간에 축을 세우고 우리는 상영중입니다. 딸과 숲을 산책 하는 구도로 되어 있는 이 시는 한 생애가 곧 '놀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 아이의 말이 시적 울림을 자아내는 이유는 놀랍게도 우주의 어떤 질서 앞에 나약한 인간의 단면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소재로 등장하는 두 성격의 미묘한 감정을 철학의 깊이까지 사유해 낸 점이 좋네요.
인(人), 물(物)이 가진 존재의 의미가 나에게 녹아들 수 있다는 걸 시를 통해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