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다방」/ 정일근/ 『시안』2002년 여름호, 2003년 소월시문학상 수상
흑백다방
오래된 시집을 읽다, 누군가 그어준 붉은 밑줄을 만나
그대도 함께 가슴 뜨거워진다면
흑백다방, 스무 살 내 상처의 비망록에 밑줄 그어진
그곳도 그러하리
베토벤 교향곡 5번 C단조를 들을 때마다
4악장이 끝나기도 전에
쿵쿵쿵 쿵, 운명이 문을 두드리며 찾아와
수갑을 차고 유폐될 것 같았던
불온한 스무 살을 나는 살고 있었으니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가는 밀항선을 타거나
희망봉을 돌아가는 배의 삼등 갑판원을 꿈꾸었던 날들이 내게 있었으니
진해의 모든 길들이 모여들고
모여들어서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중원로터리에서
갈 길을 잃은 뒤축 구겨진 신발을 등대처럼 받아주던,
오늘의 발목을 잡는 어제와
내일을 알 수 없는 오늘이 뇌출혈을 터트려
내가 숨쉬기 위해 숨어들던 그곳,
나는 그곳에서 비로소 시인을 꿈꾸었으니
내 습작의 교과서였던 흑백다방이여
memento mori*,
세상의 화려한 빛들도 영원하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모두 사라지느니
영혼의 그릇에 너는 무슨 색깔과 향기를 담으려 하느냐,
나를 위무하며 가르쳤으니
그 자리 그 색깔 그 향기로
사진첩의 속의 흑백사진처럼 오래도록 남아있는
since 1955 흑백다방,
진해시 대천동 2번지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
*시안02년 여름호/집중조명-21세기 시인
[감상]
나는 어디서 시를 쓰거나 읽었을까. 이 흑백다방 같은 곳이 어디였을까. 죽음을 견뎌낸 이 시인의 의지가 흑백다방을 되살리고, 응어리졌던 혈괴는 비망록의 붉은 밑줄이 되었습니다. 꾸준하게 좋은 시를 쓰시더니 이번에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말 그대로 절벽의 끝에서 피어난 꽃은 그 뿌리의 힘으로 향기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