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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 이성복

2003.07.21 13:29

윤성택 조회 수:1349 추천:190

『아, 입이 없는 것들』/ 이성복/ 문학과지성사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진해에서 훈련병 시절 외곽 초소 옆
        개울물에 흰 밥알이 떠내려왔다 나는
        엠원 소총을 내려놓고 옹달샘 물을
        마시는 노루처럼 밥알을 건져 먹었다
        물론 배도 고팠겠지만 밥알을 건져 먹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나는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생에 복수하고 싶었다
        
        매점 앞에서 보초 설 때는, 단팥빵
        맛이 조금만 이상해도 바닥에 던지고
        가는 녀석들이 있었다 달려드는 중대장의
        셰퍼드를 개머리판으로 위협하고, 나는
        흙 묻은 빵을 오래 씹었다 비참하고 싶었다
        비참하고 싶은 나를 바라보고 싶었다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또 일병 달고 구축함 탈 때, 내게 친형처럼
        잘해주던 서울 출신 중사가 자기 군화에
        미역국을 쏟았다고, 비 오는 비행 갑판에 끌고
        올라가 발길질을 했다 처음엔 왜 때리느냐고
        대들다가 하늘색 작업복이 피로 물들 때까지
        죽도록 얻어맞았다 나는 더 때려달라고, 아예
        패 죽여달라고 매달렸고 중사는 혀를 차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려갔다 나는 행복했고
        내 생에 복수하는 것이 그렇게 흐뭇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제대한 지 삼십 년, 정년 퇴직 가까운
        여선생님 집에서 그 집 발바리 얘기를 들었다
        며칠 바깥을 싸돌아다니다 온 암캐가 갑자기
        젖꼭지가 부풀고 배가 불러와 동물병원에 갔더니
        가상 임신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 얘기가
        아니었던가 지금까지 세상에서 내가 훔쳐낸
        행복은 비참의 가상 임신 아니었던가 비참하고
        싶은 비참보다 더 정교한 복수의 기술은 없다는
        것을, 나는 동물병원 안 가보고도 알게 되었다



[감상]
복수하는 것이 스스로 비참해지는 것이라는 발상이 섬뜩합니다. 언뜻 봐도 곳곳에 시의 치열함이 배여 있습니다. 내 고통을 타인에게 똑같이 베푸는 일, 그것이 복수라면 이 비참을 즐겨야겠습니다.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어김없이 우리에게 복수해 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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