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러지는 것들」/ 박용하/ 89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구부러지는 것들
어깨가 구부러진 청솔들에게도 한때 빛나는 유년이
있었으리라. 보기보담 일찍 구부러진 공원의 낙엽들을 나는
좋아한다. 구부러지는 식물들 그것은 윤회를 닮아 있다
강물은 오늘도 무서운 속도로 상류의 물들을 하류로 실어 나르고
둔덕의 풀꽃들은 그림자 길게 휘어 달빛을 잡는다
그리고 나는 세상을 휘휘 젓는 직선에 괴로워한다
등이 구부러진 과일들, 등이 구부러진 노인들, 등이
구부러진 황소, 야! 아예 온몸이 구부러짐의 시작의 끝인 시작의
둥근 공과도 같은 하루는 있는 것일까
구부러지다 바로 서고 바로 서다 구부러지는 풀
나는 그 풀들의 유연성을 삶이라는 이름으로 곰곰 되뇌어 본다
구부러지는 것들은 자연의 숨통을 닮아 있다
흘러가는 강의 휘어짐
세상에서 세상 밖으로 이어진 길들
한 사람에게만 마음이 휘어진 여자
하지만, 구부러진다는 것이 너에게 굽신거리는 것과 같을 때
그것이 통념일 때 우리는 압제된 사회에 살고 있네
겨울 바람에 구부러지다가도 바로 서는 한겨울의 나무들을
나는 좋아한다
구부러지는 것들
구부러지다가도 도저히 안되겠다며 바로 서는 것들
그와 같은 것들은 너무 적다
[감상]
구부러지는 것에 관한 사유가 좋습니다. 가만히 읽다보면 내 안의 구부러진 것에 대한 생각들이 떠오르는군요. 바로 서는 것들이 너무 적은 요즘의 삶에게 미안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