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김인자/ 8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장마
장마비속입니다 새삼스레 비엔 푸른곰팡이, 아니 슬픔의 냄새 같은 게 배어있다고
수선 떨고 싶지는 않습니다 비는 우울로 빚은 술, 마시면 취하는 알코올이지만 때론
마시지 않고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취하는 도수 높은 술입니다 늦은 밤의 빗소리는
먼길을 걸어와 종신서원을 마친 수도자의 기도하는 뒷모습을 떠올리지만 폭풍 속의
비는 미친개의 번뜩이는 눈알입니다 칠흑의 들판을 내달려 무엇이든 물어뜯어야 직
성이 풀릴 것 같은 근질거리는 이빨을 가진 미친개의 속성, 비는 우글거리는 생명입
니다 두꺼운 옷을 벗겨 적나라하게 원시의 시간을 걷게 하는 길 안내자입니다 마음
이 가난한 이들에게 '당신'이라는 따뜻한 호칭을 허락한 이름도 '비'입니다 비는 세
상의 모든 남자를 정부情夫가 되게 하고 세상의 모든 여자 또한 정부情婦로 만듭니
다 고백할까요? 어느 날 그와 내가 눈맞은 후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마음은 콩밭에
만 가있는 말하자면 그는 나의 기둥서방이고 나는 그 사내의 내연의 처인 셈이지요
그러나 싫지 않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복병 같은 장마
[감상]
오늘 점심나절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그 어둑해진 창문 밖으로 쏟아지는 빗속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끝 갈데 없이 생각이 그 밖을 돌아다녔습니다. 이 시는 '장마'를 '무엇이다'라고 직관해 내는 솜씨가 좋습니다.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당신이 생각나고 이 촉촉한 계절도 되새김됩니다. 장마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요즘 비가 많이 옵니다. 그만큼 생각이 깊어지는 때이기도 하고요.
전 바다를 보고 있는데 비가 내리더군요. 누군가 생각하면서 맞이하는 비는 눈물같더군요.
생각이 깊어지는 때, 그 생각의 시간이 저를 쓸쓸하게 하네요.